전 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은 미국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막말과 성추문, 탈세 의혹까지 있는 아웃사이더는 어떻게 백악관의 주인이 됐을까.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전면에 내걸고 대외적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해온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70)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국 등 우방국과의 동맹 관계 재조정과 무역 협정 재검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구축해온 세계 질서에 격변이 휘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으로 한국의 국정 리더십 공백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요구할 경우 한미 동맹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 것으로 보인다.
11월 8일(현지 시간) 미 전역에서 치러진 대선에서 트럼프는 선거인단 5백38명 가운데 2백90명을 확보해 2백32명에 그친 힐러리 클린턴(69) 민주당 후보에게 압승을 거뒀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클린턴은 전국 득표수에서 트럼프보다 100만 표 이상 앞섰으나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는 미국의 독특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미국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주별로 선출된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제’와 각 주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가 그 주의 선거인단 수를 모두 가져가는 ‘승자독식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더 많은 표를 얻고도 백악관 입성에 실패한 것이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모두 다수당 자리를 유지해 트럼프는 행정부와 의회 권력을 양손에 쥐고 강력한 대통령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부동산 재벌이자 정치 경험이 전무한 ‘워싱턴 아웃사이더’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성 워싱턴 정치에 분노하고 중산층이 붕괴된 미국 사회에 절망한 백인 노동자(앵그리 화이트)들의 변화 요구 덕분이다. CNN 출구조사 결과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 남성의 72%가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졌다. 여성에 대한 막말을 일삼아온 트럼프에게 여성 유권자의 42%가 표를 던졌고, 백인 여성 중 53%가 트럼프를 지지했다. 심지어 대학을 졸업한 백인의 트럼프 지지율도 49%에 달해 클린턴 지지율 45%를 넘어섰다.
그렇다면 백인들은 왜 트럼프에 힘을 실어줬을까. 투표 당일 버지니아 주 비엔나 시의 한 백인 중산층 남성 앤서니 로버츠 씨는 투표를 마친 뒤 투표소 뒤로 옮겨갔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트럼프-펜스’ 푯말을 땅에 꽂았다. 기자가 “트럼프를 찍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도 트럼프가 못마땅하다. 하지만 기존 질서, 기성 워싱턴 세력에게 다시 미국을 맡긴다? 이건 더 악몽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정부 기능을 일시 중단(셧다운)시킬 정도로 민주·공화당 간의 정쟁이 일상화된 정치 시스템에 대한 염증이 정치 경력이 전무한 트럼프 지지로 표출됐다는 것이다. 대선 직전 미연방수사국(FBI)의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개인 이메일 추가 수사 결정도 ‘힐러리는 기성 정치에 얽힌 사람’이란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번 대선 결과는 미국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도 겨냥하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민주주의를 이끌어왔지만 이젠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해 계속 예외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더는 탐탁지 않은 것이다. 2008년 세계를 강타한 월스트리트발(發) 금융 위기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중국·인도·일본·한국 등과의 무역전쟁에서 종종 손해를 보면서 미국 사회 저변에는 앞으론 ‘세계 경영’보다 ‘미국의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트럼프의 캐치프레이즈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미국 우선주의’는 바로 이런 미국인들의 요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미국인들, 궁극적으로는 최대 인종인 백인들의 삶을 국가가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는 중동 등에서 벌어지는 글로벌 분쟁에 개입해 정부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실속을 차려야 한다는 ‘고립주의’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트럼프는 자신이 추방하겠다고 공언한, 히스패닉 인구가 밀집한 경합 주 플로리다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중서부의 쇠락한 공업지대)’에 사는 백인 노동자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미국의 기성 질서는 이 같은 표심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트럼프 식의 ‘우리끼리 잘살자’는 말은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다. 미국 사회의 또 다른 불문율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트럼프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꼈고 선거에서 ‘침묵했던 다수(Silent Majority)’로서 트럼프를 백악관 주인으로 만들어냈다. 이제 미국 역사는 트럼프 전과 후로 나뉘게 됐다. 트럼프가 공언한 대로 미국만을 우선하는 보통 국가로 남을지, 변화된 환경에 맞춰 세계를 주도하게 될지 지구촌의 시선이 워싱턴에 쏠리고 있다.
기획 김지영 기자 사진 AP=뉴시스 디자인 박경옥 editor 이승헌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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