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보고(寶庫)라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오는 대목이다. 소설 속 한온이가 황천왕동이에게 연속해서 술잔을 권하는 장면이다. ‘뒤에 오면 석 잔’이라는 건 요샛말로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 아닌가. 나중에 온 사람은 석 잔을 거푸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먼저 온 사람들과 술기운을 맞춰주려는 주당들의 배려인지 모르겠다.
후래자삼배를 누가 처음으로 입길에 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70년이 넘은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경성(서울)을 배경으로 한 다나카 히데미쓰의 ‘취한 배’(1948년)에 이 말이 나온다. 일본어에도 가케쓰케산바이(驅けつけ三杯)라고 해서 똑같은 말이 있다.
술 따위를 남에게 권하기도 하고 자기도 받아 마시는 모습을 ‘권커니 잣거니’ 또는 ‘권커니 잡거니’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이 바른말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언중은 ‘권커니 자커니’ ‘권커니 작거니’도 입길에 올린다.
‘권(勸)하다’와 어미 ‘-거니’를 줄여 쓴 ‘권커니’는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표준어로 삼은 ‘잣거니’는 어딘가 어색하다. ‘잣’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 ‘잡거니’의 ‘잡’은 ‘술잔을 잡는다(執杯)’는 뜻이 있고, ‘작거니’의 ‘작’은 술잔(爵·酌)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집(執)’도, ‘작(爵·酌)’도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자커니’가 제격이다. 말의 뿌리가 분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게 말법이니.
거섶안주는 나물로 차린 초라한 안주를 뜻한다. 이보다 못한 안주도 있다. ‘침안주’다. 침을 안주로 삼아 강술을 마시는 걸 말한다(열에 열, 깡술이라지만 강술이 표준어다). ‘술잔거리’는 술 몇 잔 정도를 사먹을 만한 돈이라는 뜻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자기를 잡으러 온 아전들에게 건네는 돈이 바로 이 술잔거리다. ‘술추렴’은 여러 사람이 술값을 분담하거나, 차례로 돌아가며 술을 내는 것이다.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이 있다. ‘술이 가득 차면 전부 빠져나가는 술잔’인데, 욕심을 다스리라는 가르침을 준다.
송년 모임이 시작됐다. 한 해의 묵은 찌끼를 날려 보내려는 주당들의 마음이 바쁠 때다. 자, 거섶안주면 어떻고, 침안주면 또 어떤가. 벗과 나누는 술은 향기롭기만 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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