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봄소식을 복수초 속에 숨겨놓았다. 눈이 덮여 있는 겨울 들판일지라도 떠날 때가 되면 양지바른 곳에 봄을 여는 열쇠 구멍처럼 노란 꽃을 피워낸다. ‘복수초’라는 키워드로 겨울의 암호가 풀리기 시작하면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철쭉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흰 종이에 사과즙으로 써내려간 비밀편지가 촛불 위에서 글씨를 드러내는 것처럼.
여름은 봄날이 다 지나가도록 봄 속에 은신한다. 여름의 은신처는 꽃이다. 봄꽃이 질 때쯤 아카시아, 장미 같은 여름꽃이 피어난다. 꽃들이 정원과 온 산을 뒤덮도록 여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름이 파도에 숨겨놓은 비밀편지의 암호를 풀어내는 일은 에니그마(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암호 기계) 회전자의 배열을 알아내는 것만큼이나 지난하다. 여름 파도 소리는 겨울 파도 소리보다 가볍고 화사하다. 여름의 지문은 초록 속에도 감춰져 있다. 새들은 그 잎사귀 사이에 새끼들을 숨겨놓고 키운다. 여름이 초록인 이유는 노동을 유희로 만드는 속임수이기도 하다. 이글이글 타는 붉은 태양의 계절에 초록만큼 큰 위안도 없으니.
그러나 여름도 간다. 가을 낙엽도 일종의 암호다. 겨울이 여름에게 몰래 띄우는 편지. 그러나 갈색으로 탈색된 나뭇잎은 벌써 누군가 편지 내용을 읽어버렸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서서히 겨울이 다가온다. 봄을 숨기고.
계절은 서로 그렇게 암호로 연락하고 있다. 그런 비밀스러움은 세상을 신비로 가득 차게 만든다. 인간사에서도 암호의 역사는 수천 년이나 된다. 숨겨야 하는 전쟁과 모반의 역사가 암호화됐으며 이를 풀어야만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목숨 건 암호 해독 전쟁이 벌어졌다.
생명은 그 자체가 암호다. 사랑은 생명의 신비를 여는 공개 열쇠다. 암호명은 ‘사랑하라’.
그러나 현대 사회는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거나 현관문을 열기 위해 암호를 사용한다.
‘비밀의 언어’(사이먼 싱 지음·사진)는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암호의 역사를 비롯해 수학, 언어학, 양자이론까지 다양한 학문과 기술적 원리를 알기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암호 제작과 해독을 위한 분투, 암호의 진화 과정에서 축적된 과학적 유산도 정리했다. 양자화폐(양자 역학 원리를 이용해 위조를 어렵게 한 화폐)를 소개하는 책 말미에는 ‘원칙적으로 우리는 현재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자세히 알 수 없다’는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생명의 암호인 사랑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없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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