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또는 같은 시대나 같은 종류의 저작을 한데 모아 한 질로 출판한 책. 전집(全集)이다. 율곡 이이 전집 ‘율곡전서(栗谷全書)’는 1611년 ‘율곡집’으로 처음 나와 1682년 보완을 거쳐 1742년 ‘율곡전서’로 확장되었으며, 1814년에 현재의 체제로 완성되었다. 전집의 뜻에 합당한 체제를 완비하는 데 200년 넘게 걸렸다.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은 속기 원고 4만5000장과 타이프 원고 1만 장을 남겼다. 유대인인 후설의 이 방대한 유고는 나치에 의해 불살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판 브레다 신부가 유족을 설득하여 나치의 눈을 피해 벨기에 루뱅 대학으로 옮겨 후설문서보관소가 성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50년대부터 ‘후설 전집’이 출간되고 있지만 유고를 언제까지 정리할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다.
이 땅에서 서양의 전집이 처음 언급된 것은 ‘인도 브라만교의 리그베다 찬가(讚歌) 전집은 옥스퍼드대학 출판국에서 간행되었다’는 내용의 황성신문 1902년 8월 14일자 기사다. 서양과 일본의 전집은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23년 8월에는 최두선, 이갑수, 김준연 등 독일 유학생 7명이 당시 가치 1200여 원 상당의 책을 독일 현지에서 구매하여 경성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기증 도서 가운데 플라톤 전집,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괴테 전집, 빙켈만 전집, 칸트 전집, 피히테 전집, 하르트만 전집 등이 있었다.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배상금 조로 독일에 요구하여 받은 책들이 경성제국대학(1924년 설립) 도서관에 비치되기 전이다.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출판 프로젝트로 정약용(1762∼1836) 전집, 즉 ‘여유당전서’(1934∼1938·신조선사) 간행을 들 수 있다.
1935년 동아일보는 ‘다산 서세(逝世)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어 정약용은 물론이고 조선학,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여유당전서’에 관한 연구이자 논설인 최익한의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이 1938년 12월부터 1939년 6월까지 6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전집 편찬이 사회운동, 민족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진 사례다.
좋은 전집을 뒷받침하는 것은 한 시대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과 학문적 역량, 지식·문화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출판문화의 역량 등이다. 전집은 한 시대와 사회의 지력(知力)의 척도다. 우리 시대가 자신 있게 후대에 남길 만한 전집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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