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광주 광산구 월계동 ‘장고분’. 사진기자가 띄운 드론이 1호분 위로 날아오르자 열쇠구멍 모양의 봉분이 모니터에 잡혔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봉토가 연결된 일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닮았다. 무덤 길이가 45m에 이르다 보니 지상에서는 모양을 가늠하기 힘들다. 장고분은 5세기 말∼6세기 초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고분을 발굴한 임영진 전남대 교수(61)는 “20여 년 전 처음 왔을 때 이곳은 농가와 논밭으로 둘러싸여 주민들도 무덤의 실체를 잘 몰랐다”고 회고했다.
○ 장구마을의 비밀
광주 첨단과학산업단지 개발이 진행되던 1992년 12월. 지표조사에서 무덤 석실이 발견된 ‘장구촌(杖鼓村)’으로 임영진과 제자들이 현장조사를 나갔다. 전통악기 장구처럼 생긴 언덕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장구촌이었고, 임영진도 고분 이름을 한자 발음대로 ‘장고분’으로 지었다. 그가 목격한 장고분의 파괴 상태는 심각했다.
“봉분은 이미 절반쯤 사라졌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석실은 남아 있었는데 오른쪽 벽 일부가 뚫려 있더군요.”
석실 내부에는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감자 등이 저장돼 있었다. 여름에 석실 안이 시원해 농산물 창고로 주로 활용했던 것. 당시 집주인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 도굴이 돼 내가 살기 시작했을 때 석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미 도굴된 폐고분이었지만 학술적 가치는 높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임영진은 발굴보다 보존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산업단지 시행자인 당시 한국토지공사 부사장이 이전 복원을 요구했지만 그는 “1600년 전 조성된 장고분의 역사적 가치를 지키려면 현지 보존이 원칙”이라며 버텼다. 결국 보존으로 결정돼 이듬해 5월 3일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 저습지에서 건진 보물
보존구역을 설정하려면 정확한 유구 범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발굴팀은 봉분부터 파지 않고 주변에 트렌치(시굴갱)부터 팠다.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봉분으로부터 7∼15m 떨어진 외곽에서 무덤 주위를 둘러싼 구덩이가 발견된 것. 고대 무덤에서 종종 보이는 주구(周溝·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였다.
주구 주변은 개흙투성이여서 발굴이 쉽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개흙이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해 나무 같은 유기물질이 썩지 않았던 것. 1.5m 깊이의 주구에서 다양한 목기(木器)들이 발견됐다.
발굴팀은 토기와 목기의 형태, 색, 무늬 모두 독특해 또 한번 놀랐다. 특히 바닥이 뚫린 원통형 토기는 당시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하니와(埴輪·봉분 주변을 장식하는 토기)와 거의 같았다.
“이 토기와 목기들은 일본 하니와를 한반도에서 재현한 겁니다. 장고분의 독특한 구조와 더불어 무덤 주인이 왜인(倭人)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죠.”
○ 장고분 주인은 한민족인가 왜인인가
학계는 장고분 주인을 놓고 왜와 교류한 토착세력, 왜에서 파견된 유력층, 백제에 파견된 왜인 관료 등 다양한 학설을 제기했다. 임영진은 일본 내 정치 변동으로 인해 한반도로 망명한 왜인으로 본다.
그는 장고분을 비롯한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의 입지와 구조를 주목하고 있다. 5∼6세기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은 나주 반남 고분 일대인데, 왜계 전방후원형 고분은 이곳에서 떨어진 외곽에 여기저기 흩어진 단독분 형태로 존재한다. 입지나 규모로 봤을 때 이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배층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고분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교역 목적으로 일본에서 파견한 왜인으로 보기도 부자연스럽다.
임영진은 이 무렵 일본에서 야마토(大和) 정권과 이와이(磐井)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과정에서 북규슈 일대를 장악하던 세력이 떠밀려 한반도로 망명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월계동 고분 등이 북규슈 무덤의 석실 구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영산강 유역을 차지한 마한은 북규슈 세력과 오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망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다만 왜인들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각지로 분산시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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