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 선 김민섭 씨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 한 발 물러나면 사회의 균열이 보이고, 두 발 더 나아갈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대학에서 조교와 시간강사로 보낸 8년은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유령의 시간’이었습니다. 대리기사가 된 지금,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조교와 강사에게 터무니없는 대우를 하는 대학의 민낯을 고발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난해 11월 출간)로 주목받았던 김민섭 씨(33)는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올해 5월부터 대리기사로 일한 경험을 담아 책 ‘대리사회’(와이즈베리)를 최근 출간했다. 가족이 있는 강원 원주시에서 일하다 경기 파주를 거쳐 현재는 서울 합정역 인근에서 일하며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대리기사가 된 그는 냄새가 지독한 방귀를 계속 뀌면서도 절대 창문을 열지 않는 손님을 만나며 ‘나는 내 코의 주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태국 랩을 틀어놓은 손님을 겪으며 ‘나는 내 귀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됐다. 정치, 종교 등 갖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무조건 손님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야 했다. 그가 손댈 수 있는 건 브레이크, 액셀러레이터, 깜빡이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밤길을 달리면서 국가와 사회 구조에 의해 언어, 행동, 사유를 통제받는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타인과 사회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데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박근혜 대통령 역시 천박한 욕망을 대신 수행한 ‘대리 대통령’이죠.”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가훈, 급훈, 교훈, 사훈에서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사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노력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하는 데는 인색하다고 비판했다.
“대리운전을 하다 어느 회사의 화장실을 이용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일한다’,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노력한다’ 등의 사훈이 5개 적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월급을 두 배 더 준다는 말은 없었어요.”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내에게 육아의 짐을 오롯이 지운 것을 미안해했다.
“아이가 걸음마하는 과정을 제대로 못 봤어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몇 년만 고생하면 보상해 준다고 말했죠. 아내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저의 대리 인간으로 만들었어요.”
박사 논문을 절반가량 쓰고 멈춘 것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전혀요”라고 답했다.
“정직한 노동을 하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며 글을 쓰는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나는…’이 울면서 쓴 책이라면 ‘대리…’는 웃으면서 쓴 책이에요.”
그는 아내가 아이를 키우는 시간을 ‘하루보다 더 긴 하루’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그가 홀로 육아를 체험해 보면서 ‘몸으로 길어 올린 언어’라고 했다. 그는 책 출간 후 인터뷰, 강연 때문에 대리기사 일을 간헐적으로 하고 있다며 빨리 대리기사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게 노동의 힘이에요. 거리의 언어를 몸으로 익히고 사회의 균열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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