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추천할 만한 책으로 주저 없이 로제 그르니에(97)의 ‘책의 맛’(사진)을 꼽고 싶다. 소설을 쓰며 오랜 기간 난독증을 앓고 있는 한 친구는 올해는 책읽기의 어려움보다 세상을 읽어내는 어려움이 더 컸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의 힘을 믿고, 인간의 숨은 결정들이 아직 책 속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희망적이다.
그르니에는 ‘프랑스의 체호프’로 불린다. 카뮈가 편집장으로 있던 ‘콩바’지에서 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해 50년 가까이 편집자로 일해 온 그는 살아 있는 프랑스 문학의 초상이다. 동시대 작가들의 초상을 그린 ‘로맹 가리 읽기’나 ‘알베르 카뮈, 태양과 그늘’ 등에서 쓴 글은 꽤 익숙하다. 100세 가까운 나이에도 매일 아침 걷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생물학적 힘으로 글쓰기의 모터에 동력을 걸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숨쉬는 것처럼 일생 책을 읽고 글을 썼기에 가능할 것이다.
이 책에는 아홉 개의 주제로 글쓰기와 책에 관한 사색이 담겨 있다. 그가 ‘글쓰기’라는 언어의 숨을 골라 써내려간 자신의 전기와 같다. 그르니에는 말한다. “읽기는 글쓰기만큼이나 사생활에 속하는 행위다. 책 한 권 들고 혼자가 되는 시간,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쓴 페이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참으로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혼란스러운 삶을 문득 이해할 것만 같다”고.
삶이 어려운 건 삶이 삶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자체보다는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존재들이다. 고통은 친절하지 않기에 신비롭다.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삶을 이해하는 일이다.
저자는 여러 매체와 미디어 속에서 힘을 잃고 떠도는 문학의 상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빠르게 소비되는 여러 글 속에서 인간도 함께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우리들의 고민과도 닿아 있다.
그는 문학작품이 가진 기다림의 결정들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그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들은 왜 그토록 기다림이라는 주제에 의미를 부여할까? 무엇에 대한 기다림이란 말인가.”
그는 기다림에 대한 성찰을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여겼다. 기다림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삶에 스밀 수 있다고, 그리고 쓰는 일의 기다림에 대해 다시 말한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 기다리는 일은 시간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책의 맛은 어쩌면 인간이 시간으로 만들어간, 미완성된 욕망의 맛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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