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지켜보거나 취재하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2015년 초 민주-공화 양당의 경선 주자들이 하나둘씩 ‘대권 도전’을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정당별 TV토론 예비선거 전당대회를 거쳐, 올해 11월 8일 대선으로 마무리되는 2년 가까운 여정이기 때문이다.
긴급뉴스(브레이킹 뉴스)의 대명사인 미국 CNN 방송이 ‘세기의 이벤트’로 불렸던 미국 대선 대장정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전례 없는―모든 걸 바꿔놓은 선거(Unprecedented―The Election That Changed Everything·사진)’. CNN은 “우리(CNN)는 역사의 순간이나 장면을 가장 빠르게 보도하는 매체로 유명하다. 그러나 어떤 대선보다 국내외적 관심과 흥미가 집중됐던 이번 선거는 깊게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2014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인가뿐만 아니라 왜,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살피고 기록하자”는 것이었다. 정치부 경험이 전혀 없는 소설가 출신의 논픽션 작가인 토머스 레이크가 집필을 맡았다. CNN은 “레이크는 정치부 기자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번 선거판을 봤다. 그게 이 책의 핵심이다. 한 권의 소설책을 읽듯 이번 선거를 흥미롭게 돌아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비공개 일화와 사진이 적잖게 포함된 이 책은 쏠쏠한 재미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70)과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45·플로리다)은 이른바 ‘작은 손’ 논쟁을 벌였다. 트럼프가 자기보다 키가 작은 루비오 상원의원을 ‘꼬마’라고 놀리자 루비오는 “‘체격에 비해 손이 작은 사람 중 사기꾼이 많다’는 미국 속담이 있다”며 트럼프의 ‘작은 손’을 공격했다. 이에 트럼프는 “손이 작으면 다른 무언가도 작을 것이라고 하는데 난 절대 아니다”며 성기(性器) 크기까지 암시하는 ‘막장 토론’을 벌였다. 이 책은 이런 내용을 소개하며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사진을 실었다. 독자들이 손 크기를 비교해볼 수 있도록….
CNN 대표 앵커와 정치평론가들의 대선 단상(斷想)도 양념처럼 삽입돼 있다. 한 여성 평론가는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69)의 ‘첫 여성 대통령론’이 젊은 밀레니얼 여성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 대통령은 곧 나올 것이다. 이번이 아니어도 되고, 특히 클린턴이 아니어도 된다’는 인식을 보였다”고 썼다. 이 책은 트럼프의 승리 이유에 대해 “철저히 대중의 상식에 눈높이를 맞춘 결과”라고 분석했다. 기성 워싱턴 정치인들은 “우리가 당신들(대중)보다 똑똑하다. 당신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가 잘 모른다”는 태도를 보여왔지만 트럼프는 “내가 당신(대중)들의 목소리가 되겠다”며 유권자들의 소외감과 상실감을 파고들었다는 설명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건 CNN의 자기반성이다. CNN은 대선 기간에 보수 진영 등으로부터 ‘CNN은 클린턴뉴스네트워크’라고 불릴 정도로 친(親)클린턴 성향을 보였다. 트럼프와 클린턴의 3차례 TV토론에 대한 CNN의 여론조사 결과는 클린턴의 압승으로만 나와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CNN은 이런 비판에 대한 성찰보다 “트럼프가 언론을 협박하거나 기자들을 조롱하면서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크게 훼손했다”는 점을 더 강조했다. 자기반성이 힘든 건 정치인이나 언론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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