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이야 죄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강한 단맛이 죄다. 성종 10년(1479년) 6월 2일, 중전 윤씨가 폐출되었다. 폐비 윤씨다. 불과 사흘 후인 6월 5일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성종은 창덕궁 선정전에서 윤씨를 폐하여 사가로 내보낸 이유를 신하들에게 장황하게 설명한다.
“경(卿) 등은 내가 폐비한 연유를 알지 못하고 모두 다 이를 의심하니, 내가 일일이 면대하여 말하겠다. 지난 정유년(1477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곶감(乾*·건시)과 비상(砒p)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성종 독살 시도는 물론 미수였고 시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 이때도 성종은 ‘중전 폐출’을 주장했으나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폐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윤씨를 모시던 하녀들 몇몇이 벌을 받는 선에서 끝났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 대한 고삐를 더 죈다. 문제는 차기 대권 주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윤씨의 아들이 왕이 될 판이다. 어머니를 박대한 아버지를 어떻게 볼지 불안하다. 폐비에 찬성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이들의 안위도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아들 연산군은, 어머니를 박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신하들을 처절하게 숙청한다.
성종 13년(1482년) 8월 11일, 성종은 다시 ‘비상 섞은 곶감’을 들먹인다.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와 사직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곶감과 독약 비상’에 대한 서술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나에게 독약 묻은 곶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에서 “반드시 나에게 사용하려 했다”고 업그레이드시킨다. 갑자기 종묘사직도 들고나온다.
닷새 뒤인 8월 16일, 윤씨는 사사된다. 곶감이 궁중 권력투쟁에 이용된 경우다. 곶감은 달다. 곶감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니 민간이나 궁중 모두 곶감을 널리 사용했다. 단맛이 가장 강한 것은 꿀이다. 꿀은 귀했다. 귀한 과자를 만들 때나 사용했다. 생산량이 많지 않으니 민간에서는 약재로나 사용할 정도였다. 사탕수수 등에서 단맛을 뽑아낸 사탕도 있었다.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에서 오는 사신들이 공물로 가져왔지만 먼 나라의 수입품이니 민간에서는 먹기 힘들었다.
곶감은 비교적 쉽게 만들고, 구할 수 있었다. 단맛이 강하니 정과(正果) 혹은 수정과(水正果)로 만들기도 하고 노인이나 아이들의 간식으로도 이용했다.
곶감은 사대부의 소박한 선물로도 이용되었다.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선조 9년(1576년) 1월 5일의 일기에서, “편지와 함께 곶감 1접을 멀리 오겸에게 보냈다. 옛날 내가 귀양 가 있을 때 처자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고난을 겪을 때 가족을 챙겨준 고관 우찬성 오겸(1496∼1582)에게 보낸 선물이 곶감 1접이었다.
시상(*霜)은 곶감 표면에 생기는 흰 가루다. 단맛이 특히 강하다. 효종은 인선 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인조 26년(1648년) 1월, 동궁의 막내 숙경 공주가 태어났다. 산후조리 과정의 인선 왕후(당시 동궁 빈)에게 식초 넣은 국을 마시게 하고 그 사이사이에 시상을 먹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은풍(경상도 풍기) 준시(준*)에 서리가 뽀얗게 앉았다”고 했다. 서리는 역시 곶감 표면의 흰 가루다. 준시는 나무 꼬챙이 등에 꿰어서 말리는 곶감과 달리 꿰지 않고 납작하게 말린 곶감이다. 상품으로 쳤다. 허균은 “지리산에서 나는 먹감(烏*·오시)이 검푸른 색에 끝이 뾰족하며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고 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는 감나무를 재배해 곶감을 만들어 판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미 곶감이 상품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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