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명성이라는 허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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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나의 벗 모(某)가 누명을 쓰고 고을 수령에게 미움을 사 옥에 갇혔다. 그의 지친(至親)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벗은 평소 내가 믿고 존경하던 사람으로, 문장을 지을 때면 늘 조언을 구하곤 하던 사이인데, 그가 나에게 말을 전해 왔다. “나는 지병이 있는 몸으로 횡액을 당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소. 이런 사정을 수령에게 알려 선처를 받고 싶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글을 지어 주오.”

 나는 곧 초안을 작성하여 그의 지친에게 가지고 갔다. 그런데 그 지친은 다 읽고 나더니 벌컥 화를 내며 말하였다. “이런 글을 올리면 틀림없이 노여움을 사게 될 것이오. 문장이 영 좋지 않으니 못 쓰겠소. 갑(甲)에게 청해 보리다.” 갑은 그의 이웃에 사는,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윤기(尹/·1741∼1826) 선생의 ‘명성에 대하여(名解)’입니다. 억울하게 갇힌 벗을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마침 본인이 청하기까지 했으니 정말 최선을 다해 글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본 지친의 반응이 이러니, 글 쓴 입장에서는 참으로 민망하고 안타깝습니다. 정 그렇다면 글 잘 쓴다는 그분께 부탁하시지요, 뭐.

 곁에 있던 사람이 이 말이 공정하지 않음을 알고 즉시 거짓으로 둘러댔다. “이 글은 바로 그 갑이 지은 것이오. 집사(執事)는 어찌 그리 안목이 없으시오?” 이 말을 들은 그 지친은 한참 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말하였다. “그렇소이까? 다시 보니 이것도 어지간하군그래.”

 또 한참 있다가 “이거 좋소이다. 정말로 갑의 솜씨구먼” 하더니, 또 한참 있다가는 손으로 탁자를 치며 말하였다. “내가 건성으로 보았다가 좋은 문장을 놓칠 뻔했소. 이 글이 올라가면 틀림없이 풀려날 것이오. 아무 구(句)와 아무 자(字)는 기이하고도 묘하오. 갑이 아니고서야 이런 글을 지을 수 없지요.” 그러고는 마침내 올리기를 허락하였다.

 선생은 밖으로 나와 곁에 있던 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글이 금세 탈바꿈해서도 아니고 눈이 잠깐 사이에 바뀌어서도 아니고 오직 보는 자세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非其文之幻於卽地也, 非其眼之更於俄頃也, 所以視之者然也.)” 그렇습니다. 스펙이니 명성이니 하는 허상에 가려 그 사람의 드러나지 않은 참모습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윤기#명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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