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식의 날씨는 ‘화창함’이었다. 2월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3년 연속 ‘정식당’, 2년 연속 ‘라연’이 이름을 올린 가운데 ‘밍글스’가 처음으로 순위에 진입하면서 단숨에 15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주옥’, ‘도사 by 백승욱’ 등 한국적 발효나 전통 조리법과 식재료를 사용하면서 해외에서 쌓아온 요리 기법을 완성도 높게 적용하는 모던 코리안 레스토랑도 가세했다. 2016년 외식업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인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서도 전통 한식과 모던 한식, 캐주얼 한식(게장)과 사찰 음식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한식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쉐린 가이드의 마이클 엘리스 인터내셔널 디렉터는 “한식은 식재료의 품질이 뛰어나고 채소, 해산물, 육류를 매우 다양하게 요리한다. 여러 평가기관이나 해외 언론도 한국의 전통적인 요리법이나 건강한 식재료를 주목하고 있다. 더 다양한 한식이 있다는 사실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심심한 육수에 툭툭 끊기는 메밀면을 만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은 호불호가 분명해 마니아가 있는 반면 외면하는 이들도 많은 요리다. 하지만 올해 평양냉면은 마치 한번은 정복해야 할 맛의 경지처럼 주목 받았다. 면발 굵기와 고춧가루의 유무, 고명에 따라 어느 집 냉면인지를 알아맞히는 냉면 감별사는 물론이고 냉면 성애자, 냉부심, 면스플레인 등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의정부 ‘평양면옥’, ‘필동면옥’, ‘을지면옥’, 장충동 ‘평양면옥’, 논현동 ‘평양면옥’, ‘오래옥’, ‘을밀대’, ‘평래옥’ 등 고전적인 냉면집의 명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신흥 강자들도 한몫했다. 분당신도시 ‘능라도’와 논현동 ‘진미 평양냉면’은 진입 장벽이 높은 평양냉면 명가 반열에 빠른 속도로 이름을 올렸다. 의정부 평양면옥은 하남 스타필드에 분점을, 분당 평양면옥은 신세계백화점에 분점을 열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에는 안타깝게도 뼈대 굵은 노포가 드물다. 하지만 최근 특히 종로와 을지로 일대 노포에 젊은 손님들의 유입이 두드러진다. 병어찜이 기가 막힌 낙원상가 ‘호반’, 누가 상을 당하더라도 절대 솥의 불을 끄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을 지키고 있는 해장국의 명가 ‘청진옥’, 국내 최고령의 바텐더가 바를 지키고 있는 ‘다희’처럼 대를 이어 운영하거나 수십 년 세월을 지키며 주인장이 직접 일한다는 것이 주목 받는 노포의 특징이다. 왜 노포일까? 깊은 맛, 가성비, 인간미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얄팍한 술수로 짧은 생을 마감하며 자주 교체되는 식당에 지친 소비자들이 비록 모양은 허름해도 영혼이 깃든 맛을 그리워한다는 방증은 아닐까.
한편 채소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채소 열풍은 해외 외식 시장에서는 진작부터 시작됐다. 세계적인 스타 셰프 장 조지도 자신의 첫 번째 채식 레스토랑 ‘adbV’에서 뿌리부터 줄기, 잎까지 채소의 모든 부위를 활용한 요리를 선보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국내도 더디지만 채소 바람이 일고 있다. 셰프에서 농부로 전향해 500여 종의 특수 채소와 허브를 키우는 최종섭 대표의 해오름 농장, 해외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의 전문 파머로 경력을 쌓은 뒤 여주에서 농사를 짓는 박미영 농부의 농장에는 많은 요리사들이 드나들며 채소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한 채식 발효를 적극 활용하는 ‘밍글스’의 활약과 사찰식 채식 요리에 집중하는 ‘발우공양’의 미쉐린 등재가 국내 채식 요리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올해 디저트계는 유럽, 동남아발 디저트 브랜드가 가세하면서 판이 커졌다. 대만에서 대회가 따로 개최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파인애플 쿠키 ‘펑리수’는 많은 브랜드 중에서 ‘치아더’가 먼저 국내 백화점과 푸드마켓에 첫발을 디뎠다. 대만 단수이 거리의 명물로 한 조각당 무항생제 달걀 5.8개가 들어갈 만큼 엄청난 두께와 크기를 자랑하는 ‘락 카스텔라’도 인기몰이 중이다. 프랑스의 마카롱 브랜드 ‘라뒤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복합매장 ‘라뒤레 살롱 드 떼’를 열었다. 이탈리아 티라미수 전문점 ‘폼피’, 러시아 디저트 브랜드 ‘컨버세이션’, 덴마크 초콜릿 ‘라크리스’도 각각 첫선을 보였다.
셰프들의 세컨드 레스토랑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김지운 셰프가 파스타 중심의 이탈리안 요리를 선보이는 ‘볼피노’, 류태환 셰프가 보다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단품요리를 선보이는 ‘노멀 바이 류니끄’, 이준 셰프가 생면 파스타를 전문적으로 선보이는 ‘도우룸 바이 스나이예’, 김태윤 셰프가 주력인 지중해 요리는 물론이고 세계 향신 요리와 주류 페어링을 제안하는 ‘주반’을 열었다. 셰프들은 세컨드 레스토랑을 통해 훨씬 캐주얼해지거나 파인해지거나 혹은 하나의 요리에 집중하는 등 다양성이 확대되는 특징을 보였다.
요리를 즐기기 위한 보다 다양한 음료 페어링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주스, 전통주 등 색다른 페어링 시도가 늘고 있다. 주스를 요리와 함께 즐기는 주스 페어링은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 ‘미러’, ‘류니끄’ 등 컨템퍼러리 퀴진을 선보이는 곳에서 본격적인 주스 페어링을 경험할 수 있다. 한국 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한식 이외의 요리로 전통주 페어링의 범위가 넓어졌다. 서래마을의 ‘얀’은 태국 요리와 한국 술의 페어링을, 치즈 전문 미디어 ‘프로마쥬’는 치즈와 탁주의 페어링을 선보인 바 있다. 한국 술과 지중해 요리 페어링을 왕왕 시도해온 ‘7pm’의 김태윤 셰프는 아예 막걸리학교와 함께 전통주 페어링을 알리는 장기 프로젝트에 나서기도 했다.
올해는 안주 메뉴에 머무르지 않는 수준급의 메뉴를 선보이는 바들이 부쩍 늘어났다. 바앤다이닝에서 실시하는 ‘베스트 바 50’ 서베이에서 1위를 차지한 ‘앨리스’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매그넘 더 테이스팅 룸’에서 특별히 바 손님을 위해 만든 요리를 제공한다. 스타 바텐더 임재진 대표의 ‘소하’도 요리를 즐기는 칵테일 바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권경욱 바텐더가 새롭게 오픈한 ‘원티드’는 다양한 일식 메뉴를 전문적으로 마련했다. ‘모어댄위스키’는 레스토랑 ‘쏘리맘암쏘하이’의 살치살 스테이크 등을 페어링 메뉴로 내놓는다. 이번에 미쉐린 3스타를 받은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가온’은 한쪽에 ‘가온 바’를 마련하고 고급 요리와 명주의 페어링이 가능하도록 했다.
주류에서는 진과 실버 테킬라가 관심을 받은 한 해였다. 영국의 국제주류연구소(ISWR)는 화이트 스피릿 성장률이 최근 몇 년 사이 큰 폭으로 높아졌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에서도 프리미엄 테킬라와 진의 시장이 넓어지고 있는 추세다. 진은 진토닉, 마티니, 김렛 등 칵테일의 베이스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프리미엄 진이나 고급 재료를 더한 핸드메이드 스몰 배치 진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L7호텔의 루프톱 바 ‘플로팅’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진 수십 종을 모은 진 전문 바로 주목을 받았다. 화이트 스피릿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화이트 바’도 등장했다. 조니워커 하우스 총괄 매니저에서 ‘화이트 바’ 대표로 독립한 장동은 대표는 “아직까지 대다수 바 애호가들이 위스키를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앞으로 진이나 프리미엄 테킬라 시장이 확대되면서 화이트 스피릿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내추럴 와인도 화두로 떠올랐다. 3월 ‘정식바’에서 자연주의 와인 세미나와 갈라 테이스팅이 처음 시도됐다. ‘제로 컴플렉스’ ‘뚜또베네’ ‘수마린’ ‘보칼리노’ ‘류니끄’ 등 유명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들이 내추럴 와인을 알리는 데 적극 앞장서고 있다. 아직은 레스토랑에서만 마실 수 있는데 네이처 와인, 다경 등 내추럴 와인만 소개하는 수입사들이 등장하고 있어 보다 적극적인 확산이 기대된다. 제로 컴플렉스의 클레멍 토마생 소믈리에는 “요즘은 너무 많은 와이너리들이 테루아, 전통 등에 대해 거짓을 말한다. 내추럴 와인 병 안에는 GMO, 호르몬, 농약 없이 오직 포도 주스만이 담겨 있다. 몇 년 전부터 내추럴 와인 추종자들이 늘어나면서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미국, 호주, 스페인 등지에서 흥미로운 내추럴 와인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먹고 마시는 문화는 결코 ‘재미’만 추구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이슈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곤충, 채소, 도시 텃밭, 제로 웨이스트 등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더디지만 꾸준하게 확산되고 있다. 올 한 해 만나온 아르티장들의 활약을 통해 문화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전통을 이어가는 아르티장들이 내일의 미식 문화에 훌륭한 자양분이 될 거라는 희망도 가졌다. 이제 거의 바닥이 보이는 2016년 술잔을 깨끗이 비우고 다시 ‘2017년’이라는 새로운 술잔을 짐작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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