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방은 한 시대를 풍미한 전통 춤꾼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춤을 배워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살풀이의 예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지금까지 두 종목을 보유한 인간문화재는 그가 유일하다. 이매방이 2015년 타계한 뒤 최근 유족들이 그의 유품을 전북 전주에 있는 국립무형유산원에 기증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이 유품들을 토대로 ‘명무, 이매방 아카이브로 만나다’라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기증 유품은 공연 영상과 사진, 공연 의상과 소품, 각종 편지 등 다양하다. 그런데 그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오래된 재봉틀이다. 춤꾼과 재봉틀이라니. 이매방은 자신이 직접 무복(舞服)을 지어 입었다고 한다. 이매방 재봉틀은 1920년대에 생산된 ‘싱거(Singer)’ 모델이다. 이매방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니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들어왔을 것이다. 싱거는 재봉틀에 있어 세계 최고 브랜드의 하나로 꼽힌다. 그 역사도 깊다. 우리나라에 재봉틀이 도입된 건 1900년경 일본을 통해서였다. 예전엔 재봉틀을 미싱이라 불렀다. 재봉틀은 영어로 ‘소잉 머신(sewing machine)’. 일본인들이 여기서 소잉을 떼내고 머신을 미싱으로 불렀고 그게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지금은 집에서 재봉틀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재봉틀을 갖고 있는 가정이 적지 않았다. 재봉틀을 이용해 옷 수선은 기본이고 치마 바지 버선 등 일상복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도 많았다. 재봉틀은 생계를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그래서인지 재봉틀은 인기 있는 혼수품으로 꼽혔다. 6·25전쟁 때 재봉틀을 등에 지고 피란 간 사람도 많았다.
이뿐 아니다. 재봉틀은 1960, 70년대 봉제 섬유산업의 필수품이었다. 우리의 근대화 산업화의 숨은 역군이었던 셈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1989년)에 나오는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에 미싱의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매방은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잘했다고 한다. 그 재주로 싱거 미싱을 돌려가며 열심히 무복을 만들었다. 자신의 무복뿐만 아니라 제자들 것까지 만들어 주었다. 어찌 보면 재봉틀은 이매방 춤의 동반자였다. 그 덕분에 승무와 살풀이가 우리에게 잘 전해 올 수 있었으니, 흥미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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