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무대 위에 펼쳐 놓는 겁니다. 관객의 인생에 메시지를 던져 줄 수 있는 연극이 바로 ‘좋은 연극’이죠.”
한국 연극 연출계의 대부로 통하는 임영웅 대표(80)의 눈빛은 손에 희곡 대본을 쥐는 순간 변한다. 작품을 할 때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연출 노트에는 배우들의 호흡, 동선, 발성법까지 일일이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돼 있다. 환갑을 훌쩍 넘긴, 잔뼈 굵은 노배우들에게도 발성과 호흡 하나하나까지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
60년 연극 외길 인생을 걸어온 임 대표가 최근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산울림극장에서 만난 그는 “훈장을 받으러 가기 전날, 과연 내가 이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나 고민이 들어 한숨도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난 그저 내가 연극이 좋아서 한평생 연극만 만들며 살아왔어요. 국가를 위해서 연극을 만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 국가가 그래도 내 연극 인생을 평가해준 것 같아 감사하죠.”
1955년 연극 ‘사육신’을 연출하며 연극계에 데뷔한 그는 1985년 ‘연극 학교’로 불린 산울림소극장을 개관해 수많은 연출가와 명배우를 배출했다. 산울림소극장 개관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꾸준히 공연되며 한국 연극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 ‘위기의 여자’ 등 이른바 여성 연극 붐을 주도하면서 중년 여성이라는 관객층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였다.
임 대표는 “2008년 ‘고도를 기다리며’의 원작자인 사뮈엘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 더블린 페스티벌 초청을 받았다”며 “현지 언론으로부터 ‘한국에서 온 연극인들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진수를 보여줬다’고 평가받은 것은 연극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년에도 ‘고도…’를 또 올릴 것”이라며 “죽기 전까지 평생 함께하고 싶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작고한 김무생을 비롯해 박정자 손숙 윤석화 사미자 등 당대 내로라하는 숱한 배우들과 작업한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로 1977년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함현진을 꼽았다. 45년간 31번째 ‘고도…’를 연출하면서 총 41명의 배우와 작업한 그는 “초연을 포함해 내리 세 번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던 함현진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배우였어요.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게 소원이었던 친구였는데 일찍 죽었죠. 나중에 ‘고도…’로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과 파리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 친구가 그렇게 생각이 나더라고요.”
임 대표와 작업하지 않은 배우는 있어도 한 번만 작업한 배우는 없다. 그는 “젊었을 때는 ‘목숨 걸고’ 연극을 했다”며 “에너지를 모두 연극에 쏟는 편인데, 배우가 연극을 우습게 알거나 대강 하려 하면 나는 절대 함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초심은 6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 “다들 나랑 일할 땐 힘들어해요. 원작을 장, 막별로 쪼개 분석하고 공부시키거든요. 대본만 외우는 배우는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일까. 그를 거쳐 간 많은 배우들이 그를 ‘연기의 아버지’로 꼽는다. 배우 윤석화 등이 대표적이다.
1세대 연극인으로서 최근 불거진 예술인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는 연극인들이 세태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무대에서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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