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서울!/박한규]김천의 겨울 들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31일 03시 00분


 겨울이다. 색 바랜 겨울 들판은 고요하다. 간혹 서리나 눈으로 색조화장을 해 보지만 곧 민낯을 드러낸다. 변화가 없어 완전히 생명을 잃은 듯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확에서 이어진 휴식의 한가로움이 있다. 그래서 겨울을 밤과 비 오는 날과 함께 3여(三餘) 즉, 세 가지 여유라 했다. 가슴을 더디 달리게 하는 농경사회의 선물이다.

 농사짓는 사람은 아니지만 겨울이어서 더 따스한 햇볕을 쬐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여유를 가졌다. 아파트와 논밭의 다소 어색한 조화이지만 둘의 혜택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텅 빈 들판의 지나간 영화(榮華)를 떠올려 본다. 밭은 분명 논보다 풍성했다. 우선 등장인물에서 차이가 난다. 고추 파 마늘 참깨 들깨 콩 가지 토마토 고구마 감자 호박 무 배추 등등. 길게 외줄로 늘어선 벼 포기의 모노드라마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모습도 아주 다양하다. 어린순들은 구분마저 곤란하지만 자라면서 모양도 키도 제각각이다. 꽃이 피는 시기, 크기, 색깔도 다르고 결실 또한 그러하니 내내 변화무쌍하다. 조명과 의상을 제대로 갖춘 한 편의 화려한 뮤지컬이다. 조명이 꺼지고 출연진이 사라진 들판을 보고서야 그 풍요의 정체는 풍성함이 아니라 다양함이었음을 알게 된다.

 발길을 옮기다 채 무대를 떠나지 못한 몇몇 퇴역들이 눈길을 끈다. 수확의 화려한 박수를 받지 못하고 선 채 굳어버린 고추 콩 들깨 호박! 말라버린 대에는 여전히 붉고 푸른 고추, 누런 콩꼬투리, 거무튀튀한 들깨 수술이 많이 달려 있다. 굵은 주름이 움푹 파인 늙은 호박은 말라 가늘어진 줄기를 힘겹게 붙들고 있다. 무거운 열매를 업보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는 어느 비닐하우스 안 포도송이들이 나를 무겁게 한다.

 분명 수확의 설렘을 안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지지대도 세웠을 텐데 어찌 이들은 마지막 영광은 고사하고 고단한 몸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은 걸까. 쓸모를 다한 탓일까, 아니면 그냥 관심에서 멀어진 탓일까. 저마다 특별한 사연이 있겠지만 아무 말이 없다. 겨울이 가고 들판이 색을 되찾기 시작하면 저들은 조용히 다음 생명의 잉태를 도와 다시 태어나겠지.

 지나간 모든 것들은 지나간 만큼의 의미가 있다. 영광도 쇠락도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 아무도 살아 본 적이 없는 2017년에는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관심과 애정으로 사랑하며 살 일이다. 따뜻하게 보듬고 살 일이다. 

―박한규

※필자(54)는 서울에서 공무원, 외국 회사 임원으로 일하다 경북 김천으로 가 대한법률구조공단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겨울#농사#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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