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53>새로 시작하는 무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0일 03시 00분


장앙투안 바토, ‘이탈리아 희극배우들’.
장앙투안 바토, ‘이탈리아 희극배우들’.
 18세기 프랑스는 낭만과 지성의 시대였습니다. 절대 군주, 루이 14세 사망 이후 경직되었던 사회 분위기에 변화가 일었지요. 당대 상류층들은 야외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살롱에서 토론을 벌였어요.

 지붕 수리공 아들로 태어난 장앙투안 바토(1684∼1721)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화가였습니다. 감미로운 귀족 연회 그림으로 귀족층과 미술계의 극찬을 이끌어 내었지요. 그렇다고 화가가 상류사회의 호사스러운 한때만을 주목한 것은 아닙니다.

 화가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던 배우들에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다수의 판화와 유화를 남겼지요. 특히 화가는 18세기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유랑극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번듯한 극장이 아닌 거리와 장터 임시 무대에서 펼쳐졌던 공연은 꼼꼼한 대본도 없었어요. 무대 시작과 끝, 중심 사건과 맡은 역할 정도만 대략적으로 정해 두고 공연을 했지요.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인사라도 하는 것일까요. ‘이탈리아 희극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군요. 반짝이는 금빛 복장에 망토를 두른 연기자의 손짓이 피에로를 가리킵니다. 얼뜨기 하인에서 점차 낭만적 인물로 바뀌면서 치솟던 인기가 반영된 것일까요. 비열함과 교만함, 우유부단함과 어리석음을 연기했던 배우들 중 피에로가 그림 정중앙에 있습니다. 그런데 단추 달린 긴소매 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피에로는 무척 어색한 모습입니다. 조금 전 관객을 울리고 웃겼던 서글픈 표정과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흔적도 없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 피에로는 비로소 하얀 분칠에 가려졌던 피에로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은 것이겠지요.

 화가는 왜 피에로를 막 끝난 공연과 곧 시작될 삶의 막간에 세워둔 것일까요. 세상은 무대이며, 인간 삶은 배우의 덧없는 연극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세계는 극장이며, 우리 인생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새롭게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라 주장하려 했던 것일까요. 화가는 질문을 던질 뿐 대답은 우리 몫입니다. 

 새해를 맞아 공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저녁 시간 공동의 관심사와 관련된 글을 읽고 토론을 했지요. 현실의 이름표를 뗀 자리였습니다. 역할에 맞춤한 분장도 지운 상태였지요. 수많은 제약과 의무의 경계를 넘어서자 시들했던 것들에 차츰 생기가 돌았습니다. 늦은 밤, 남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본격적인 무대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프랑스#장앙투안 바토#이탈리아 희극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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