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어떤 중이 탁발(托鉢)을 하다 함경도 지방에 들어갔다. 그곳 사람들은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 노끈으로 엮어 만든 갓에 개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중이 처음에는 양반에게 절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똑같이 대했는데 누구도 그를 꾸짖지 않았다.
어떤 모임을 지나는데, 옷차림이 조금 나은 자가 술에 취해 상석(上席)에 앉아 있었다. 그는 중이 자기에게 따로 절하지 않는 것에 노하여 잡아다 매를 치려 하였다. 중이 싹싹 빌며 사죄하고 여러 사람들이 말려 준 덕에 매질은 면하였다. 상석에 앉은 자는 의기양양하게 중을 불러 술을 주며 말했다. “네가 남쪽에서 왔다니 나와 조금은 말 상대가 되겠구나.” 그러고는 나이와 지나온 곳 등을 꼬치꼬치 물었다.
중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하면서도 분한 마음이 가슴에 꽉 차 속으로 이렇게 탄식하였다. ‘저 개가죽 옷을 입은 놈이 나를 이토록 치욕스럽게 하니, 내가 진정 개만도 못하단 말이냐.’
성대중(成大中·1732∼1809) 선생의 ‘청성잡기(靑城雜記)’ 성언(醒言)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중을 천대하는 것이야 시대가 그래서였다고는 하지만, 천대받는 입장에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갑자기 개 한 마리가 울타리에서 튀어나와 짖으며 술자리를 향하여 앉았다. 그러자 중이 갑자기 개 앞으로 달려가 절하며 “부처는 ‘개도 불성(佛性)을 갖추었다’ 하였으니, 중이 개한테 절하는 것이 뭐 욕될 게 있겠는가” 하고는 지나온 곳과 이름, 나이 등을 상석에 앉은 자에게 대답할 때와 똑같이 낱낱이 진술하였다. 이어 “맞이해 절을 올리는 것이 조금 늦었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사죄하였다. 상석에 앉은 자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개한테 절하는 것도 중의 예법인가. 또 어찌 개한테 잘못했다고 사죄한단 말인가?”
중이 곧 머리를 치켜들고 성난 기색으로 말했다. “개털을 빌려 입고도 오히려 사람을 위협하여 절하게 하는데, 개털을 본래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假毛於狗, 猶足威人而督之拜也, 況其固有之者耶)?”
분노한 자의 날선 풍자가 통쾌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갑질’이 만연한 시대.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습니다. ‘성언(醒言)’은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