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희경 씨(37)는 2014년 여름 꼬박 2주 동안 고개를 숙이고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그래야 왼쪽 눈에 주입한 가스가 갑자기 떨어진 망막(급성 망막 박리)을 제대로 눌러 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책이나 TV도 보지 못했다. 병원을 오가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었다. 앞날의 두려움이 그를 조여 오자 마음도 납작 엎드렸다. ‘이대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수술에도 불구하고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구만 간신히 살렸다. 2008년 등단하고 6년 만에 찾아온 육체의 시련이었다.
“나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20대 때 꿈꿨던 삶은 어디로 갔을까’ 싶었지요.”
10일 오후 7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 기차역사 건너편 건물 3층 자신이 운영하는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만난 유 씨는 “전에 일하던 출판사 동료들이 서점에 놀러 와서 ‘너 얼굴 좋아졌다’고 한다”고 했다.
유 씨는 한쪽 시력을 잃고 나서야 그동안 시 쓰기와 직장 일 모두에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열심히는 살았는데,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깨졌던 거지요. 괄목할 만한 시를 쓰지 못했고, 편집자로서도 원하는 만큼 일이 진행되지 않았고…. 일에 집중하고 즐기는 일을 하고 싶은데 이도 저도 못하는 것 같았고요. 책임감만 있지 실력은 없는 거 아닐까 싶었죠.”
2014년 겨울 유 씨가 회사에 낸 사표는 반려됐고, 유 씨는 1년여 더 직장에 다니다 지난해 초 그만뒀다. 시집 전문 서점을 내겠다고 하자 아내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지인들에게 계속 의견을 물었다. 동료 시인이자 은사인 김소연 시인이 말했다. “해 봐.” ‘내가 이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싶었다.
지난해 6월 문을 연 ‘위트 앤 시니컬’은 카페 파스텔과 공간을 공유한다. 널찍한 한쪽 벽면에 다른 장르의 책 없이 시집들만이 표지를 드러냈다. 시집들이 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대형 서점이 아니라면 서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게 시집 아니던가. ‘위트 앤 시니컬’은 달마다 시집을 1000여 권씩 판다. 유 씨는 기고나 강연, 프로젝트 참여 등으로 버는 수입을 합치면 직장 다니던 만큼 번다고 했다.
서점을 열면서 시작(詩作)도 풀렸다. 공저 등을 통해 다른 책은 계속 내 왔지만 시집을 정식으로 낸 건 2011년 ‘오늘 아침 단어’가 마지막이다. “전에는 시를 써도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00을 쓸 수 있다면 30, 40 정도 된다고 할까요. 요즘은 마음에 드는 시들이 좀 나와요.”
유 씨는 그동안 쌓인 시들에서 골라낸 것과 최근 시를 모아 6월 새 시집을 낼 예정이다. “첫 시집이 소년기였다면 이번에는 좀 성숙해지고 싶다”고 했다. 2013년 대림미술관 전시를 겸해 비매품으로 낸 시집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도 이달 복간할 예정이다.
‘위트 앤 시니컬’ 2호점도 2월 서울 마포구 합정역 근처에 연다. “1호점의 안착은 많은 분의 관심과 도움 덕이 컸어요. 2호점을 통해 시집 전문 서점과 기획단체로 ‘위트 앤 시니컬’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실험해 보고 싶습니다.”
인터뷰 도중에도 옆자리에는 유 씨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고, 손님들은 계산대에서 유 씨를 찾았다. “2016년은 기사회생의 해였고,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여전히 두렵기도 하지만 이제는 정말 시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유 씨는 오전 11시∼오후 9시 서점을 지킨다. 낭독회 등 서점의 각종 행사는 ‘위트 앤 시니컬’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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