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타자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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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전동 타자기를 산 청년은 노트에 적어둔 시들을 밤새 쳤다. 매일 밤 청년은 타자기를 갖고 놀았다. 이듬해 여름 폭우로 둑을 넘은 물이 마을로 밀려들 즈음 청년의 어머니가 집을 향해 내달렸다. 물이 차오르던 집에서 어머니는 타자기를 들고 나왔다. “아들이 집에 오면 이것만 갖고 노는데 없어지면 큰일 나지.”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1995년) 수록 시 대부분을 그 타자기로 쓴 시인 허연의 이야기다.

 시인 안도현은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년)을 원고지에 썼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 ‘모닥불’(1989년),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년)는 타자기로 쳤다. 컴퓨터의 ‘무진장 지웠다가 다시 쓸 수 있는 기능에 매료된’ 시인은 네 번째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년)을 286 컴퓨터로 입력했다. 프린터 출력 원고를 우편으로 보낸 것은 다섯 번째 시집 ‘그리운 여우’(1997년)가 마지막이었다. e메일 전송 시대가 열린 것.

 작가 장정일은 1982년 설 하루 전날 클로버 타자기를 8만 원 주고 샀다. 작가는 이 타자기로 시집 여러 권에 나눠 실을 만큼 많은 시를 썼고, 중편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썼다. 시인 기형도(1960∼1989)는 대학 시절 교내 문학공모에 당선된 후 상금으로 세계문학전집과 수동 타자기를 사고는 친구 성석제에게 ‘배부른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도 상금 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이자 가수인 밥 딜런은 수동 타자기로 3년간 직접 자서전 원고를 썼다. 처음 타자기 앞에 앉았을 때만 해도 오래된 일을 떠올릴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써 내려가기 시작하자 ‘기억의 창고’가 열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1873년 레밍턴사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타자기를 내놓았다. 마크 트웨인이 ‘미시시피 강의 생활’(1883년)을 타자기로 쓴 이후, 한 세기 이상 이어진 ‘탁 타탁 타타탁∼’ 소리는 사실상 멈췄다.

 “타자기는 인간이 말하는 방식 그대로 쓴다”고 말한 헤밍웨이, 타자기로 “시와 산문을 두드려 만든다”고 했던 영국의 계관시인 존 메이스필드, “잊어버린 추억을 불러내어 외솔타자기로 몸과 마음을 빚는다”고 한 시인 오탁번…. 소리의 리듬이 글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손끝의 느낌이 몸을 일깨우는 타자기는 단순히 글 쓰는 도구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이기(利器)를 대가로 치르고 이제 기억으로만 아득히 남은 것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전동 타자기#장정일#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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