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던진 말로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반대로 고마움을 느낄 수도 있다. 일상에서의 오해는 내국인이냐 외국인이냐, 남자냐 여자냐의 차이도 약간 영향이 있겠지만 대부분 각자 살아온 세월의 배경 때문에 언어 습관이 달라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지역 여성들의 모임에서 남편의 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 어떤 사람은 설거지를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남편이 “(나갈) 준비 다 됐어?”라고 물어봐 화가 났다고 했다. 식사 후 같이 나가기로 했지만, 설거지를 끝내고 샤워를 하고 나가려면 시간이 걸리는 줄 뻔히 알면서 빨리 준비하라는 재촉을 언제나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몇 시에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하라고 편안하게 말해줄 것이지, 금방 나가야 된다 식으로 긴장되게 말하니까 싫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남편이 냉장고 안에서 우연히 못 먹게 된 음식을 봤을 때, 꺼내서 부인에게 보여주면서 “이것 먹을 거냐”고 물어보는 게 싫다고 했다. 누가 봐도 못 먹을 것 같이 보인다면 “상한 것 같으니 버리겠다”고 말할 것이지, 왜 일부러 상한 것을 보여주면서 부인의 잘못을 따지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은 “남편이 모든 질문에 ‘네, 아니요’로 한마디로 대답하라”고 했다며 “가족인데 마치 경찰관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보통 상대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 추측하고 알고 싶은 내용을 바로 대답할 수도 있는데, 집에서 신문하듯 “내가 묻는 말에 하나하나 대답하라”고 하니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의 배경에는 남존여비적인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일까. 물론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도 있지만 “부부가 하나 되면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해석도 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상대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하는지 말하는 당사자는 잘 모른다. 때로는 나에게는 그 말이 부담되니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겠느냐며 서로의 화법을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은데 대부분은 그냥 일방적으로 참고 가는 경우가 많다.
문득 말로 인한 과거의 실수담이 생각난다. 9년 전 아버님 상을 당한 한 선배에게 여러 명의 부의금을 갖다드리러 지방에 내려갔다. 마침 점심시간이 돼 무엇을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길래 내 딴에는 부담을 안 주기 위해 머리에서는 백반 같은 비싸지 않은 메뉴가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입에서는 “한정식요”라는 말이 나왔다. 아마 그 순간 선배도 당황했을 것이다. 9년 정도 전 이야기라서 백반은 50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한정식집에 도착해 음식이 나올 때까지 이 실수를 눈치채지 못했다. 선배는 1인당 1만 원짜리보다 1만5000원 짜리가 더 나으니 그것을 시키자며 나를 배려해줬다. 부의금 갖고 왔으니 비싼 것 사달라고 덤빈 철없는 후배라는 생각도 들 텐데, 오히려 먼 데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보여준 것 아닌가 싶었다. 한국에서는 대접한 사람이 오히려 “덕분에 잘 먹었다”며 고마움을 표할 때가 많다. 사준 사람이 왜 얻어먹는 사람에게 고마워하는가라고 보통 생각이 되지만 “혼자라면 이렇게 맛있는 것 안 먹는데 같이 먹어주니까 나도 덕분에 좋은 것을 먹을 수 있었다”라는 설명에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가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곳곳에 보이는 한국은 참 아름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일본에 계셨던 한국인 교수님은 학생들이 자신의 방을 찾아오지 않아서 무척 섭섭하셨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폐를 끼치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늘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 교수님은 “그것은 폐를 끼치는 것 아니다. 그리고 왜 폐를 끼치면 안 되는가. 폐를 끼쳐 달라”고 말씀하셔서 그 이후에는 학생들도 교수님 방을 자주 찾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도 개인 사생활을 극도로 중요시하는 일본에 비해서 지극히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한국인의 한 단면이다. 늘 상대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배려심으로부터 나오는 한마디는 천 냥 빚을 갚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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