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장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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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학기 학생들이 종강 후에도 모여서 소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해서 학교에 나가보았다. 내가 맡고 있는 강의는 ‘소설창작’인데 4학년이 되면 취업을 위한 강의 위주라 이제 창작 수업을 들을 수 없는 학생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다. 날도 추운데 월요일 저녁마다 실습실에 나와 소설을 읽고 쓰는 시간을 갖고 있다니, 격려도 해주고 맥주도 한잔 사주고 싶었다.

 그런데 먼저 선물을 받게 됐다. 학점도 나갔고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제자들에게 받은 선물이라면 김영란법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반장이 대표로 준 납작한 상자에는 모직 장갑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며칠 후, 다른 출판사로 자리를 옮긴 한 편집자와 오랜만에 만났다. 간밤에 두 시간밖에 못 자고 나왔다고 하자 그녀가 왜냐고 물었다. 어떤 작가의 책은 일단 손에 들면 다 읽기 전까지 덮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줌파 라히리나 필립 로스 같은 작가들. 그날 밤을 새워 읽은 책은 필립 로스의 두 권짜리 장편 ‘미국의 목가’. 짧게 말하면 스위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한 한 가족의 몰락을 그린 작품이고, 더 상세히 말하려면 뛰어난 운동선수였던 그가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업의 품목이 장갑이었다는 것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듯싶다.

 가죽을 고르고 무두질하는 법, 손가락 사이를 재봉질하는 법부터 배워 사업을 성공 궤도에 올려놓은 스위드가 장갑에 관해 하는 이야기는 생생하고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공장에 견학을 온 사람에게 그는 묻는다. 사람한테는 있는데 원숭이와 고릴라에게는 없는 게 무엇일까?

 정답은 엄지.

 그는 “인간의 손의 아래쪽에 있는 손가락, 어쩌면 이게 우리와 다른 동물을 구별해주는 신체적 특징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켤레의 장갑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많은 협업 과정에 대해서도. 사실 이 소설은 목가적이라기보다 강렬한 비애에 가깝다. 인물들이 삶을 겪어내는 방식으로 보면. 하긴 소설이란 그렇기도 하겠지. 어떤 사람들이 그 자신의 삶을 겪으면서 쓰러지고 넘어서고 다시 시작해보려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

 신나게 책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17년 차 편집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문득 이런 소리를 했다. “저는 소설이 제일 좋아요.”

 소설 모임을 만든 학생들도 그날 누군가는 소설이 제일 좋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정말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고. 이 혹한과 내핍의 시절에도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고 책을 만들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추위가 덜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안쪽에 털이 촘촘하게 들어간 새 장갑을 끼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조경란 소설가
#장갑#필립 로스#미국의 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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