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왜관철교와 전쟁의 상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9일 03시 00분


6·25전쟁 격전지였던 경북 칠곡군 왜관철교(1905년 건축). 작은 사진은 독특한 모양의 교각 아래 부분.
6·25전쟁 격전지였던 경북 칠곡군 왜관철교(1905년 건축). 작은 사진은 독특한 모양의 교각 아래 부분.
 1950년 8월,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밀렸다. 낙동강이 뚫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수해야 했다. 그 절박함 속에서 미군 제1기병사단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왜관철교의 일부 구간을 폭파했다.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로써 북한군의 추격을 따돌렸고 북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왜관철교는 ‘호국의 다리’로 불렸다.

 다리(교량)는 전쟁과 악연이다. 다리는 늘 길목이고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1950년 12월 초 평양의 대동강철교. AP통신의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는 당시 대동강철교 사진을 찍었다. ‘대동강철교를 건너는 피란민’이란 이름의 사진. 그 사진 속엔 파괴된 철교 위를 목숨 걸고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포로 교환 때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6·25의 비극을 상징한다. 판문점에서 임진강을 따라 임진각으로 가다 보면 자유의 다리가 나온다. 휴전협정 뒤 포로였던 국군과 유엔군 1만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오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온 뒤 자유의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그들에게 저 다리는 생명이고 자유였다.

 왜관철교는 20세기 지난했던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 철교는 원래 1905년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부설한 군용철도의 교량이었다. 1941년 인근 낙동강 상류 쪽에 복선 철교가 건설되면서 인도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6·25의 격전을 치렀고 이후 2011년엔 홍수로 교각 하나가 유실되고 상판 2개가 붕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왜관철교는 독특한 교각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 아니라 표면에 수많은 화강암을 덧대어 한껏 멋을 냈다. 교각의 아래쪽은 아치형 장식을 만들고 붉은 벽돌로 마감했다. 근대기 철교 가운데 매우 드문 경우다.

 지금 왜관철교는 평화롭기만 하다. 언제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을까 싶다. 낙동강 물에 잠겼다 드러나기를 무수히 반복했을 교각의 아치 부분. 낙동강 물길은 전쟁의 상처를 얼마나 치유해 줄 수 있을까. 전쟁에서 다리는 치열한 격전장이고 죽음의 공간이었지만 끝내 자유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었다. 전쟁과 다리.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
#6·25전쟁#왜관철교#호국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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