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주인공 오기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며칠 만에 눈을 뜬다. 그리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기관이 오직 눈꺼풀 정도라는 사실, 아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학교수로 인생의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에게 갑자기 달려든 반전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겨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왼손으로 등 긁개를 잡는 일만 가능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몰입은 기억의 반추다. 그는 자리에 누워서 기억을 꿰맞춰 나간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한 것이 생각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아내를 생각한다. 기자의 사명감과 거리가 먼, 그저 샤넬 슈트를 입은 멋쟁이 오리아나 팔라치를 꿈꾸던, 조금은 허영 있던 여자.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았고 대부분 이뤄내지 못했지만 사랑스러웠던 여자. 그리고 마침내 ‘동경’과 ‘욕망’을 구별하게 된 여자. 여기까지가 그가 알던 그녀였다. 거기에는 어떤 오차도 없이 정확한 형태의 아내가 완성돼 있었다.
책의 제목이 ‘홀(hole)’인 것은 완벽한 인생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지점을 오기가 기억해 내기 때문이다. 홀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여러 번 모습을 드러냈지만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간병인을 자처하던 장모에게서 서서히 구멍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재에서 딸이 써왔던 글, 마지막이 될지 모르고 작성했던 ‘고발문’을 읽고 나서 장모의 마음은 굳어진다. 오기의 악행에 대한 최종 보고서. 그날부터 장모의 복수가 시작된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복수가 아닌 피 말리는 폭력이다. 그녀의 딸이 오기에게 당했을 고통의 데칼코마니다. 부부 사이의 커다란 ‘홀’을 무시한 채 영달과 명예를 향해 내달린, 아내의 불만을 피해의식으로 치부한 오기. 부부관계는 유지했지만 부인의 존재를 무시했던 오기처럼, 장모는 간병인 역할을 하면서도 오기가 ‘병신’임을 각인시킨다. 어느 날부터 장모는 마당에 큰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장모에게 오기는 추잡하게 살아남으려는 존재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때 한 번도 감사하지 않았으면서 다 잃고 나서 이해해 달라고 조르는 비열한 존재다. 딸이 큰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아무것도 못 봤으면서 자신이 빠진 시궁창에서 나갈 수 없느냐며 눈치 보는 쓰레기다. ‘강자’와 ‘약자’가 나뉘는 순간은 둘 중 하나다. 균형을 이루던 관계에서 한 명의 힘이 강해지거나 혹은 약해지거나. 영원한 강자도 약자도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기가 그렇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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