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미 박사 연구 발표
공민왕뿐 아니라 충렬왕의 비도 다루가치와 갈등하며 견제
자기몫 권력 가진 존재로 이해해야
고려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지지했던 정치적 조력자이자 죽은 뒤에도 공민왕이 초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반면 1274년 10월 고려 왕실에 시집온 첫 번째 몽골 공주인 제국대장공주(1259∼1297·齊國大長公主)는 통상 몽골의 이익을 대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 내에서 몽골 공주의 정치적 위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명미 서울대 박사(사진)는 이화여대 사학과와 이화사학연구소가 24일 여는 학술대회 ‘13∼14세기 몽골과 동아시아 교류사’에서 이에 주목한 연구를 발표한다. ‘고려 왕실에 하가(下嫁)해 온 몽골 공주들: 그 정치적 위치와 고려-몽골 관계’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이 박사는 “몽골 공주와 몽골 조정을 대리하는 다루가치와의 갈등으로 볼 때 몽골 공주로서 갖는 권리와 권력은 상당 부분 남편이자 황제의 부마인 고려 왕에게 직결돼 있었다”고 밝혔다.
충렬왕과 혼인한 제국대장공주(몽골 이름 쿠틀룩케르미쉬·忽都魯揭里迷失) 역시 달리 볼 만한 점이 있다고 이 박사는 분석했다. 고려에 시집온 다른 몽골 공주들이 당시 몽골 황제와 3∼8촌이었던 데 비해 제국대장공주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어서 위세가 가장 강성했던 공주다.
이 박사는 몽골이 고려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파견한 다루가치 흑적(黑的)과 제국대장공주의 갈등에 주목했다. 흑적은 고려 부임 7개월 만인 1275년 7월 몽골로 돌아가 황제에게 고려에 대해 이것저것 일러바쳤고, 이에 따라 원 세조는 제후국인 고려 왕자의 호칭, 관직명이 황제 국가와 같다는 문제 등을 지적하는 조서를 보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국대장공주는 흑적의 귀국을 만류했고, 그럼에도 흑적이 돌아가자 그가 황제에게 고려를 헐뜯는 걸 우려해 수하를 보내 흑적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몽골 공주지만 고려 왕실의 편에 선 듯한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 박사는 “몽골 공주는 황제의 입장을 바로 대리한다기보다 몽골의 분봉(分封) 체제에서 제국에 대한 자기 몫의 권리와 권력을 갖는 존재였다”며 “고려 왕비가 된 공주 역시 몽골 중앙 조정과 부딪히면서 남편인 고려왕의 권력이 어그러지는 것을 막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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