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동아일보 독자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소개하는 글을 월요일마다 게재합니다. 첫 필진은 황두진 건축가, 성기웅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대표, 박용완 국립극장 홍보팀장(전 월간 객석 편집장),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관장, 이영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입니다. 》
이 책은 어떤 ‘특별한 기록’에 대한 기록이다. 그 특별한 기록은 인류 문명이라는 또 다른 기록에 대한 것이다. 결국 이 책은 ‘기록의 기록의 기록’인 셈이다.
특별한 기록의 실체는 금박을 씌운 구리 레코드판 두 개다. 그 레코드판은 40년 전에 발사돼 지금도 초속 16∼17km로 별 사이의 공간을 항해 중인 우주선 보이저 1, 2호에 실려 있다.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며 쏘아 보낸 타임캡슐이다. 사진과 음악, 그리고 여러 나라 말로 엮은 지구인의 인사를 담았다. 사실상 발견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므로, 지구인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도 볼 수 있다.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의 여름방학 과제처럼 들리지만 이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당대의 각 분야 대가들이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저명한 천문학자이자 저술가인 칼 세이건. 프로젝트 아이디어도 그가 냈다.
참가자들은 정말로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일에 매달렸다. 먼 미래의 외계인에게 어떻게 지구를 알릴 것인가? 아마도 이건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거창해서 자칫 우스워 보일 수도 있는 이 과제에 사람들이 열심히 달려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영원성’에 있다. 참가자들은 보이저 1, 2호에 실린 레코드의 수명을 10억 년 정도로 예측했다. 사실 영원은 아니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영원이라 부를 만한 수준에 근접하는 엄청난 시간을 프로젝트의 기한으로 잡은 것이다. 질문 자체가 참가자들의 사기를 고양시킬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를 주관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정부 기관으로 대중 여론에 민감한 조직이다. 레코드판에 남녀의 누드 사진을 담는 계획 등 조금이라도 비판을 받을 듯한 내용에는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예산도 빠듯했고 주어진 시간도 반년 남짓으로 어처구니없이 짧았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해냈다. 우주적 메시지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는 한편 다양한 견제와 싸워가며 의지를 관철해 결국 그것을 먼 우주로 떠나보냈다. 그 과정에서 참가자들이 보여준 유머와 기지, 진지한 통찰력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성을 갖는 사물로서의 이 책은, 책이라는 형식 안에서 최대한 어떤 기록의 영원성을 갈구한 결과물로 보인다. 묵직한 하드커버에 디자인도 약간 고전적이다. 유한한 삶 속에서 권력과 부를 부질없이 탐하다 참담하게 몰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일 같이 들어야 하는 지금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이 책이 환기하는 의미는 각별하다.
보이저 우주선이 문득 뒤를 돌아 촬영한 사진 속 지구는 그저 미세한 하나의 점,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보였다. 유한한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영원과 무한에 대해 가끔 생각할 필요가 있다. 때로 그 생각의 단서를 주는 건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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