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내는 내 한국 이름을 탐탁지 않아 한다. 한국 이름이라니? 한국 사람들은 이민이나 유학을 가면 흔히 영어 이름을 짓고 그 이름으로 자기소개를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한국 이름이 외국인에게는 발음이 어렵고, 영자로 쓰는 것이 복잡하거나 보기에 무척 생소하며,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한국 이름의 성과 이름을 구별해 알려주기도 힘들어서다. 나는 이 이유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는데 네 살 때 부모님과 호주로 이민 갔다. 우리 셋 모두는 네덜란드 이름을 호주에서 쓰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호주인들은 자꾸 우리 이름을 왜곡시켰다. 물론 그들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 이름인 Koos는 ghost(귀신)로, 나의 이름인 Jacco는 Yucko(맛없다는 뜻)로 발음했다. 영어 모음이 네덜란드의 모음과 너무 다르게 읽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네덜란드 이름을 약간 변경해 영어식으로 쓰고 발음하기로 했다. 나의 이름은 스펠링을 바꾸지 않고 발음만 바꿔서 서류에 같은 철자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별명(왜코, 재코)처럼 들렸지만.
그 다음에 한국에 이민 왔다. 역시 한국어 발음대로 나의 이름이 또다시 돌연변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15년 전쯤 한국 이름을 직접 지었다. ‘남재구’다. 성으로 남쪽 남을 선택한 이유는 역사 및 지리학적 배경 때문이다. 364년 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화물선이 대만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제주도 앞바다에서 난파됐다. 이 사건은 나중에 ‘하멜 표류기’로 기록됐고, 한국은 이 이야기로 유럽에 알려졌다. 살아남은 네덜란드 선원들은 조선에서 13년간 살면서 한국인들에게 남 씨로 불렸다. 배가 남쪽에서 왔기 때문이다. 옛날에 중국에서 외국인을 오랑캐라는 뜻으로 ‘남만’이라 부른 것이 한몫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호주도 한국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네덜란드 출신인데 호주에서 자란 나로서는 ‘남쪽 남(南)’이 제일 적합한 성이라고 생각했다.
‘재구’라는 이름은 나의 영어 이름과 똑같진 않지만 비슷하고 내 귀에는 괜찮게 들렸다. 그런데 아내의 반응은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 옛날 강아지 이름 같다며 “황구도 있고, 백구도 있으며, 재구도 있다”며 낄낄거렸다. 그래도 더 나은 이름을 제안해주지 않았기에 내 한국 이름은 그대로 남재구로 남게 됐다.
반응은 다양하다. 일단 묻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한국 이름을 처음부터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영어대화를 아예 나눠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장모님, 일부 직장 동료들, 교환학생으로 고려대를 다닐 때 만난 학우들, 교통방송국에 계신 김어준 뉴스공장장이나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 PD 등이 그런 경우다.
반면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도 많다. 건네주는 내 명함을 보고 “한국 이름이 있어요?”라고 묻거나 “이거 누구의 이름인가요?”라고 의심하는 이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묻는 사람 중에는 자신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이름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남재구’ 대신 ‘자꾸’ 또는 ‘재코’, 심지어 ‘재곱’ 또는 ‘야곱’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서로 존댓말을 쓰는 중에도 내 이름이 영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호칭이나 존칭이나 직급을 붙이지 않고 말이다.
한국말을 잘하는 한 영국 친구가 나의 한국 이름을 고수하려는 수고스러움을 보면서 웃었다. 그는 내 노력을 정체성을 부인하는 백해무익한 짓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보진 않는다. 정체성을 부인하기는커녕 기존의 정체성에 새로운 면을 부가하는 일로 간주한다. 제2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면 나를 형성하는 자아의 또 다른 일부가 생기는 것 같다. 해외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마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삼각기둥이라면 네덜란드인이라는 ‘면’이 존재하는 만큼, 호주인 ‘면’도 존재하며, 한국인 ‘면’까지 존재한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내가 원하지 않은 이름이 불리는 탓에 성나고 사람들을 바로잡기도 했으나 요즘에는 스토아 철학에 몰두해 있어서 그냥 내버려두고 나만이라도 계속 나의 한국 이름을 쓰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한다. 누가 아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무슨 삼투압 현상처럼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적응하고 나를 그렇게 불러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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