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크러시’(girl crush)…. 여성이 특정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 상태다. 무대에서 ‘shut up!(닥쳐)’을 외치는 가수에게, 청문회에서 사이다 같은 일침을 쏟아내는 증인에게, 당당하게 내 꿈을 펼치는 여성들에게 우리는 그런 감정을 느낀다. 한국뿐일까. 세상엔 오늘도 문을 부스며 역사를 써나가는 ‘당찬 언니들’이 있다. 쏟아져 나오는 외신 속 그녀들의 역사를 담아내기 위해 ‘글로벌 걸크러시’를 연재한다.》
공중무대에 선 155㎝ 여성의 몸에서 밤하늘을 찢을 듯한 깊은 성량이 뿜어져 나왔다. ‘이 땅은 너와 나를 위해 있다. 자유와 정의의 하나님 아래’라는 가사가 흘러나오자 불빛은 한 데 섞여 성조기를 그려냈다. 위태롭게 달린 두 줄에 기댄 그녀는 몸을 공중에서 돌리며 중앙무대로 내려왔다. 관객들은 광신도처럼 무대로 손을 뻗었다.
미국 스타에게 ‘미식축구리그(NFL) 수퍼볼’ 하프타임쇼는 꿈의 무대다. 올해 이 무대에 선 주인공은 ‘작은 거인’ 레이디 가가였다. 그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타다. 올해 고작 31세인 그녀는 지난해 기준 한해 680억 원을 벌어들였다.
‘레이디 가가’라는 예명은 영국 록밴드 퀸의 ‘라디오 가가’를 딴 예명이다. 본명은 스테파니 조앤 안젤리나 제르마노타. 몇 년 전 누리꾼들은 박근혜 대통을 조롱할 때 그의 이름을 차용해 ‘레이디 가카(각하를 소리나는 대로 표현)’라고 불렀다. 공교롭게도 가가(gaga)는 ‘노망이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닌’이란 뜻을 담고 있는 단어다.
그녀의 음악성은 더 이야기해봐야 입이 아프다. 그녀의 스타성은 그가 걸어온 질곡의 역사를 알 때 비로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 노래로 다스린 상처
짱돌처럼 단단해보이는 그녀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다. 19세였던 2005년 경 그는 음악 프로듀서에게 강간을 당했다. 가톨릭 신자였기에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한채 상처를 속으로 삭였다. 그는 2015년에서야 ‘Swine(나쁜인간)’ ‘Till It Happens To You(당신에게 일어나기 전까지는’이라는 곡을 발표하며 그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를 사랑하는 여성들이라면 가슴깊이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같은 해 아카데미 시상식 때 학내 강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더 헌팅 그라운드’의 OST로 삽입된 ‘Till It…’을 피아노에 앉아 열창하던 모습이다. 무대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문구를 적은 사람들이 등장해 감동을 더했다. 그녀의 가족들마저 이 장면을 보고서야 그의 아픈 과거를 알았다고 한다.
지난해엔 뉴욕의 성소수자 청소년 쉼터 ‘알리 포니 센터’에 방문해 “아시다시피 나는 과거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 수년 간 이를 치유하려고 정신적·육체적 치료를 많이 했기 때문에 지금은 웃을 수 있게 됐다”고 털어놨다. “나는 (여전히) 정신질환과 매일 싸우고 있다”고도 고백했다.
약자를 위해 자신의 숨기고 싶은 부위를 드러내고, ‘힘내라’는 말대신 ‘나도 노력중’이라고 말하는 그녀. 참 ‘곰탕’같은 여자다.
●할 말 다하는 센 언니
이렇게 가슴이 뜨거운 그녀지만, 정작 강자(强者)들에겐 빳빳이 고개를 든다. 여성을 비하하는 마초스러운 정치 지도자 앞에, 예술성 보다 그녀의 몸을 흠잡는 악성 댓글러를 향해 그는 가감없이 할말을 쏟아낸다. ‘곰탕’보다는 ‘사이다’같은 모습이다.
그는 ‘여성비하’로 논란이 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맨해튼 트럼프타워 앞에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한 파파라치는 그가 트럼프 당선으로 충격받아 차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포착하기도 했다.
악플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수퍼볼 하프타임이 끝난 뒤 일부 악플러들은 그의 몸매를 공격했다. 키가 작고, 허벅지가 굵고 탄탄한 소위 ‘몸짱’과는 거리가 먼 겉모습을 흠잡은 것이다. 이에 8일 그녀는 “내 몸매를 화제로 삼은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내 몸이 자랑스럽다”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당신이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몸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면서.
현대 여성들은 모든 것이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간다. 일 잘하는 건 기본이다. 예쁜 것도 실력이요, 살찌는 것은 죄라며 스스로를 옥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완벽해야 한다는 ‘알파걸 콤플렉스’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센 언니’ 레이디 가가는 이렇게 말한다.
“온전한 내가 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챔피온의 자세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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