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한국동란이 터졌을 때 소년은 서울 혜화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종로 광교 옆 큰댁으로 가는 길에서 소년은 난생처음 주검을 목격한다. 인민군의 무쇠 탱크가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집에 찾아온 어느 깡마른 손님을 따라 외출한 아버지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러더니 또 홀로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무덥던 8월 어느 날, 한참 만에 꾀죄죄한 몰골로 나타난 아버지를 보고 소년과 소년의 형제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부터 소년은 종로 큰길에서 조선인민보며 해방일보를 파는 일을 시작한다.
초가을, 아버지를 찾아온 청년의 제안대로 아버지는 평양 시찰단의 일원이 돼 북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영영 이별이었다. 집안은 풍비박산. 어머니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피란 짐을 쌌다 풀었다 하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와 큰누나는 이북 사람이 됐다. 어머니는 부역자로 낙인찍혀 징역을 살고 나왔다. 이후 소년은, 아니 청년은 미국으로 떠나 이민자의 삶을 살게 된다.
소년의 아버지는 1930년대 서울 제일의 모던보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쓴 구보 박태원이다. 소년은 그 구보 씨의 장남으로 이 책 ‘소설가 구보 씨의 일생’을 쓴 자칭 ‘팔보’ 박일영 선생이다.
아버지와 불과 10년 남짓 함께 살고 헤어졌던 아들은 아버지에 관한 기록과 기억과 풍문의 조각을 맞추고 꿰어 그의 일생을 재구성했다. 서울 토박이 아니랄까 봐 과거 사실을 다룰 적이면 깍쟁이처럼 빈틈없이 정확을 기했다.
소설가 아버지와 문인들의 담배, 원고 심부름을 하던 꼬마 아이의 기억력은 비상하다. 집 안에서 들은 온갖 귀동냥의 기억 위에 미국 시민권자로서 방북해 얻은 소식을 더해 만만찮은 정보를 책에 담았다. 리얼리스트, 모더니스트, 비정치적 예술지상주의자이면서도 정치적 문학을 강요받는 북한에서 한때 최고의 소설가로 군림한 구보의 수수께끼가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다. 책장을 뒤로 넘길수록 팔보는 사무치는 사부곡(思父曲)의 곡소리를 낸다.
나는 운 좋게도 팔보 선생님으로부터 이 책을 직접 받았다. 미국 버지니아 주 전원도시에 있는 그 댁 서재에서 팔보 선생은 희수(77세)를 바라보며 필생의 과업처럼 이 책을 썼다. 아버지를 꼭 닮은 치렁치렁 긴 문장들에는 그가 이민을 떠나기 전에 쓰인 옛 서울말이 담겨 있다.
깨알같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도 팔보 선생은 책의 여러 군데에서 “말을 물고 이야기를 아껴두겠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남북한으로 갈라지는 통에 생겨난 마음의 생채기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에, 이산(離散)의 역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기에 알고도 미처 말 못 할 사연이 많다는 것이다. ‘말을 문다’는 한국말 표현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