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염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4일 03시 00분


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죽을죄를 지었다”며 사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여기는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며 어깃장을 놓는다. 최순실 씨의 돌변한 행태다. 이를 지켜보던 환경미화원이 소리쳤다. “염병하네.”

‘염병(染病).’ 전염병이라는 뜻 외에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 장티푸스는 천연두, 콜레라 같은 전염병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이 병이 한 번 돌았다 하면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곤 했다. 그래서 전염병 하면 장티푸스가 떠올라 염병이 장티푸스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조항범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오늘날 염병은 흔하지도 않고, 또 걸리더라도 쉽게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염병을 이용한 욕이 언중의 입길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건 왜일까. 염병에 대한 혐오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일 성싶다.

‘염병할’ ‘염병할 ×’이 많이 쓰인다. ‘염병할’은 그러니까 무서운 병을 이용해 매우 못마땅함을 나타낼 때 하는 욕이다. ‘염병할 ×’은 ‘염병을 앓을 ×’이라는 뜻. 더 지독한 욕도 있다. ‘염병에 땀을 못 낼 놈’이라는 속담이 그것. 땀을 내면 낫는 병으로 알려진 염병을 앓는 사람에게 땀도 못 내고 죽을 사람이라고 퍼붓는 셈이다.

‘50일 전 죽을 죄 졌다더니 첫 재판에서 혐의 모두 부인.’ 역시 최 씨 재판과 관련한 한 신문 제목이다. 한데 여기엔 두 가지 잘못이 보인다. 먼저 ‘죽을죄’는 붙여 써야 한다.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는 게 맞춤법의 원칙이지만 죽을죄는 ‘죽다’와 ‘죄’가 만나 ‘죽어 마땅한 큰 죄’를 가리키는 새로운 단어가 됐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속담 속 돌다리가 돌과 다리가 합해져 하나의 낱말이 됐듯이. 그러고 보니 죽다와 관련한 합성어도 많다. ‘죽을고(더는 어찌할 수 없게 된 어려운 처지나 지경)’ ‘죽을병’ ‘죽을상(거의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는 표정)’ ‘죽을힘’ 등이 있다.

두 번째는 ‘죄를 졌다’가 아니라 ‘죄를 지었다’로 써야 옳다. ‘죄를 저지르다’는 뜻의 동사 ‘짓다’는 ㅅ불규칙용언으로 ‘죽을죄를 지어/짓고/지었다’로 활용된다. 즉 ‘신세나 은혜를 입다’는 뜻의 규칙용언인 ‘지다’와 달리 ‘지어’와 ‘지었다’를 ‘져’, ‘졌다’로 줄여 쓸 수 없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염병#장티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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