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아노.’ 두 낱말 다섯 음절을 되뇌는 기분이 이중적이다. 잠시 그리워하다 이내 소스라친다. ‘내가 다시 피아노를 친다면’이라는 가정은 전제조건에 따라 결론이 다르다.
아마추어로서 친다면 오랜 그리움이 기분 좋게 충족될 거다. 프로페셔널을 꿈꾸며 다시 피아노를 친다면…. 가끔 꿈에서 대면하는 그 상황엔 한결같이 소름이 돋는다.
피아노는 오랫동안 내 삶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국영수와 함께 내신 성적표를 구성하는 한 칸이었고,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시험 도구였다. 결론은 보시다시피 전문 연주가나 교육자가 되지 못했다. 그저 전(前) 전공생임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쇼팽에 도전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책을 잡으며 ‘아마추어의 열정이란!’ 하고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600쪽 넘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오직 아마추어이기에 발산할 수 있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열정에 감동했다. 아마추어의 이 ‘위대한’ 열정이란!
저자 앨런 러스브리저는 1995년부터 20년간 영국 일간 가디언의 편집국장을 맡은 언론인이다. 종이에서 디지털로 매체 환경이 바뀌는 격랑 속에서 가디언호의 순항을 이끈 러스브리저는 2010년 여름 어느 날 쇼팽 발라드 1번 완주라는 도전에 몸을 싣는다. 지인 30여 명 앞에서 쇼팽 발라드 1번을 선보이기까지 16개월. 아마추어로서 쇼팽 발라드 1번에 도전한 그즈음은 그의 30여 년 언론인 생활에서 가장 바쁜 시기였다.
취미에 너무 매진해서가 아니다. 그가 쇼팽 발라드 1번과 함께한 2010년 8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가디언은 전 세계를 흔드는 특종들을 잡아냈다. 위키리크스, 줄리언 어산지, 에드워드 스노든, 도감청, 폭로 등의 단어가 책 속에서 쇼팽 발라드 1번의 음표들과 병치된다. 당시 가디언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했던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휴대전화 도청 스캔들을 보도해 해당 매체 폐간을 이끌었다. 폐간 소식이 알려진 다음 날 아침에도 러스브리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스스로 약속한 20분의 연습을 꾸역꾸역 마치고 일어섰다.
책의 감상 포인트는 셋이다. 세계적 언론사가 특종을 물고 관리하고 공개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 알프레트 브렌델, 이매뉴얼 액스, 머리 퍼라이아, 스티븐 허프 등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이 전하는 쇼팽 발라드 1번에 대한 조언. 마지막으로 상상 이상의 투자를 아끼지 않는 아마추어의 무한한 열정.
독자에 따라 세 포인트 모두가 마음에 와 닿을 수도 있고 일부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쇼팽 발라드 1번을 조밀하게 해석한 부분은 ‘도 아니면 모’다. 이 곡을 연주해 봤거나 잘 아는 사람에게는 정서, 정신, 신경, 근육의 특정 부분을 콕 집어 자극할 만큼 ‘동감의 쾌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나 피아노에 무관심했던 독자라면 이 부분의 책장을 휙휙 넘기거나 반대로 예상하지 못한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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