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여름, 6·25전쟁이 끝났다. 화가 장욱진은 부산 피란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종로구 내수동 집은 포화로 망가졌고, 그려놓았던 그림은 옆집의 불쏘시개가 되어버렸다. 장욱진은 한동안 형과 화가 유영국의 집에서 기숙한 뒤 종로구 명륜동에 자리 잡았다.
궁핍한 시절,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먹고사는 일은 시종 힘겨웠다. 전세방을 전전했다. 그때 부인 이순경 씨(이병도의 딸)가 나섰다.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명륜동 가겟방을 구해 책방을 차렸다. 1954년 혜화동 로터리로 옮겨 동양서림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1960년대 중반엔 바로 옆 새 건물로 옮겨 규모를 확장했다.
1954년 장욱진은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1960년 교수를 그만두었다. 이어 1963년부터 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기 남양주 덕소, 서울 명륜동, 충북 충주 수안보, 경기 용인 마북동을 오가며 창작에만 매진했다. 그 와중에도 부인 이 씨는 꿋꿋하게 동양서림을 지켰다. 예술가 아내로서의 희생적인 삶이었다. 1987년 부인은 1954년부터 함께 일해 온 직원 최주보 씨에게 조건 없이 서점을 넘겼다. 2004년부터는 최 씨의 딸이 운영하고 있다.
혜화동 로터리,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 거기 동양서림이 있다. 양철 간판은 빛이 바랬다. 군데군데 녹이 슬고 페인트칠도 떨어져 나갔다. 간판 한 모퉁이 ‘since 1953’ 문구가 보는 이를 오랫동안 사로잡는다. 이 간판은 1980년대 후반에 설치한 것이다. 10년 전 내부 수리할 때, “간판은 꼭 옛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단골손님들의 간곡한 의견에 따라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켰다. 다만 ‘since 1953’ 문구만 최근 세련된 디자인으로 살짝 바꿨다. 이 서점의 고객은 대부분 단골들. 고은 허영자 시인, 정일성 촬영감독은 지금도 이곳을 찾는다.
세종시(옛 연기군)의 생가, 용인 마북동 고택,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등 장욱진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 하지만 혜화동 동양서림도 장욱진을 기억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장욱진의 투명한 그림들, 생계를 책임졌던 부인의 헌신, 동양서림과 함께했던 많은 예인들….
내년 1월이면 장욱진 탄생 100주년이다. 얼마 전 동양서림 바로 옆에 사는 큐레이터를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양서림의 역사와 장욱진의 미술을 돌아보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어요. 바로 이곳 동양서림에서요.” 멋진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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