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간도 하면 봉오동과 청산리대첩의 독립전쟁 영웅담으로 기억되는 게 보통이다. 그 승리 뒤에 자신은 굶주려도 독립군을 위해 주먹밥을 뭉치고, 추위를 이길 감발을 만들었던 이들이 있었다.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의 기고 3회를 통해 북간도 한인들의 생활문화를 살펴본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지 꼭 100년, 순국한 지 72년째 되는 해다. 윤동주 하면 ‘북간도 명동촌’을 빼놓을 수 없다. 북간도는 ‘항일독립운동의 기지’라는 수식어에서 보이듯 대한독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기지이기 이전에 두만강을 건넌 한인들이 새로운 이상향의 민족공동체를 세우려 했던 곳이다. 그분들도 먹고, 입고, 자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렸다. 이러한 생활문화가 항일독립운동기지의 토대였음은 굳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윤동주만 해도 그렇다. 일본에서 운명했으니 시신은 어떻게 옮겼을까. 미혼인데 정식으로 상례(喪禮)를 치렀을까, 유족들은 어떤 상복을 입었을까, 장례식은 어떻게 치렀을까에는 관심조차 없고 그저 항일민족시인만 되뇌었다. 명동촌 밤하늘의 총총한 별과 바람이 있었고, 추억의 일상 생활문화가 그의 주옥같은 시구의 탄생 배경이었음에도 말이다.
윤동주는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가수 윤형주의 부친)이 위험을 무릅쓰고 형무소로 간다. 먼저 고종사촌 송몽규를 면회하여 윤동주의 사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시체실로 간다. 방부 처리로 잠자는 듯 보이는 시신을 인수해 후쿠오카의 어느 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일부의 유골을 항아리에 넣어 용정으로 돌아온다.
윤동주의 장례식 사진을 보자. 가운데에 유골함을 넣은 관이 세로로 놓여 있고, 그 앞에 검정 리본을 건 영정을 세웠다. 그 왼쪽에는 용정중앙교회 교인과 기독교(개신교)식 장례식을 집전한 문재린 목사가 있다. 이들은 상복을 입지 않았다. 오른쪽에는 유족이 있는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검정 두루마기에 삼베 두건을 쓰고 있다. 여성들 역시 검정 치마저고리와 함경도 수건을 쓰고 있다.
같은 해 문익환 목사의 조모 박정애 여사의 장례식이나 1942년 규암 김약연 선생의 장례식에서 보이는 삼베로 지은 소색 상복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혹시 미혼이기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유일한 어린아이가 고깔처럼 생긴 두건을 쓴 모습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모습이다.
한인들은 1900년에 있었던 문익환 목사의 증조부 장례식에서는 외빈(外殯·관을 별도의 장소에 가매장)을 하거나 만장을 앞세우고 행상을 하는 등 유교식 상례를 치르고 있었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희생당한 이들의 합동장례식에 등장하는 상여도 영락없는 전통적인 상여다.
명동촌은 1909년 정재면의 권유로 개신교 신앙공동체로 탈바꿈한다. 처음에는 조상의 추도식조차 금할 정도로 엄격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장례식 사진에 상주들과 참석자들이 왼쪽 가슴에 단 근조 리본, 검은색 상복 등은 원래의 전통과 많은 부분에서 변화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본래의 전통도 지키고 있어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개신교 문화가 융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년 후면 3·1운동 100주년이 된다. 이제 독립운동 자체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을 했던 그분들의 생활문화 역시 역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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