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많이 드러나 알려진 사람을 훌륭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평가할 수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 조금 알고 나면 자신이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특히 학문에 처음 입문하여 겨우 한 단계 진보한 상태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것과 같은 자만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언제나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시비를 판단할 뿐이니, 그 결정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내디딜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시야가 넓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이다. 반면 한 치 앞밖에 바라볼 수 없는 좁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볼 수 있는 세상의 전체를 내디딜 수 있기에 쉽게 자만하게 된다.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내가 아는 사람만이 능력 있고 훌륭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사람 수를 고려할 때에 내가 아는 사람보다 내가 모르는 사람 속에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시야와 관심을 한정하고 확장하지 않는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눈을 돌릴수록 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은 한 번에 한 방향밖에 주시하지 못하지만, 세상은 한 방향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방뿐 아니라 팔방 그 이상이 있고, 위도 있고 아래도 있다. 공간적 세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세상도 존재한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 시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아울러 하나를 새로 보게 되면 내가 보지 못하는 그 나머지는 또 얼마나 되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임도(趙任道·1585∼1664)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澗松)이다.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퇴계학과 남명학을 모두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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