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함께 사는 것은 죄악으로 여겨졌고 기혼 여성의 수입은 가장인 남편에게 종속됐다. 여성은 TV 시청 계약조차 본인 이름으로 할 수 없었고 남성의 동행 없이는 술집에서 술을 시킬 수 없었다. 2017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일이 1970년대 이전 영국의 일상이었다.
40년 만에 현저히 달라진 여성 인권은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중 한 명으로 손꼽힐 만한 해리엇 하먼이 지난달 자서전 ‘여성의 일’을 펴냈다. 하먼은 1982년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35년이 넘도록 영국 하원 최장수 여성 국회의원으로 일해 왔다.
그는 1950년 의사인 아버지와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네 딸을 양육하느라 주부의 길을 걸었다. 하먼 역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곳곳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암초를 만나야 했다.
‘잘못된 일인 것을 알면서도 부조리에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던 내성적인 그가 여성 인권의 기수가 된 것은 시민자유전국협회(NCCL)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NCCL 회원들은 가정과 직장에서의 여권 향상, 성(性) 소수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무료 변론과 관련 법령 개선 운동을 펼쳤다.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 하먼은 런던 페컴 지역 국회의원으로 처음 국회에 발을 들인다. 당시 그는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국회에 들어선 하먼에게 ‘여자가 아이를 놔두고 일을 나가다니 버려질 아이가 불쌍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더욱더 가정과 일 두 가지에 충실하겠다고 결심한다. 이후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데이비드 캐머런 등이 잇달아 총리로 집권하는 동안 노동당 국회의원으로서 여권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하먼이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때 여성 국회의원 수는 18명으로 전체 의원 수의 4%였다. 2015년에는 191명으로 국회의 29%였다. 현재 많은 영국 여성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출산 후 보육 제도, 임신 및 출산으로 인한 부당해고 금지, 남녀 임금의 차별 철폐는 하먼과 다른 여성 의원들이 수십 년간 국회에서 싸워 온 결과다.
영국 유력 일간지들은 자서전 출간 소식과 서평을 다루며 이 책이 영국 여성 인권사를 한눈에 보여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노동당 부총재까지 지낸 하먼이 여성 문제 이외의 사안을 소홀히 다뤘다는 점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하먼은 유명 정치인이 아니며 그가 펼쳐 온 정책들이 영국 역사에 길이 남거나 회자될 만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처음 국회에 입성했을 때 결심했던 것처럼 여권 향상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노력해 왔다. 언론의 엇갈린 평에도 이 성실한 정치인의 여정을 지지하는 듯 여러 독자서평 사이트에는 호평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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