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지역 주민의 휴식공간이자 만남의 장소로 이용될 정도로 깨끗하게 변했습니다. 공공근로요원들은 물론 인근 농협 직원들이 정기적으로 청소도 하고, 불법 주차를 막기 위한 경찰들의 순찰도 수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중심가에 위치한 ‘영동 3·1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4일 영동 일대에서 벌어진 항일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이 비석의 관리에는 대(代)를 이은 부자(父子)의 헌신적인 노력이 담겨 있다.
이 기념비 앞에서 2대째 자전거 수리·판매점을 운영하는 신달식 씨(60)와 그의 부친 신동우 씨(1992년 72세로 작고)가 주인공이다.
신동우 씨는 1986년 이곳에서 자전거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3·1운동 기념비는 잡초로 가득해 탑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뾰족한 창 모양으로 된 철제 펜스로 둘러싸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을 정도였다. 어린이들이 놀다가 철제 창에 찔릴 뻔한 일도 자주 일어나 한때 기피 시설이 됐을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본 신동우 씨는 이후 손수 잡초를 걷어내고 사비(私費)를 들여 잔디를 심은 뒤 매일 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역 농업고등학교 교장인 지인의 도움으로 무궁화 수십 주(株)를 기증받아 심고 키우기도 했다. 2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달식 씨는 “아버지께서 3·1운동 기념비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도심 속 흉물처럼 방치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애정을 갖고 정성껏 관리하셨다”고 말했다. 신동우 씨는 3·1절이 되면 흰 국화를 기념비 앞에 올려놓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달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이 관리하다 보니 마찰도 잦았다. 기념비 주변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어서 노점상들이 수시로 근처에 손수레나 좌판, 또는 트럭을 놓고 장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신동우 씨는 기념비의 건립 취지를 설명해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며 욕설을 퍼붓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동우 씨는 기념비를 지키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기념비 관리는 달식 씨의 몫이 됐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하던 일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라며 “지금은 정비가 잘돼 있고 관(官)에서 관리도 잘해 예전처럼 할 일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달식 씨는 “작은 일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3·1운동 당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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