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 3·1운동은 우리 민족정기를 민중의 토대 위에 꽃피게 한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였습니다. 본사에서는 전국적으로 3·1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3·1정신을 영원히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새겨두고자 합니다. 이 운동은 남녀노소, 전국의 모든 애국동포의 협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아일보가 창간 45주년을 맞은 1965년 4월 1일자 1면 사고(社告)다. 동아일보는 1932년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업을 일제강점기부터 계속해왔고, 3·1운동 기념비 설립 사업도 그 연장이었다. 또한 3·1운동의 결과물로 생겨난 동아일보이므로 이 같은 사업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사고를 낸 뒤 기념비 건립을 위한 유적지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했다. 기념비 건립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견해에 따라 기념비건립위원회도 구성했다.
연구와 현지답사 등을 거쳐 첫 결실로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리에서는 1919년 4월 4일 정오 수천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시위에 들어가려 하자 일본군이 발포해 88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5명은 체포돼 총살당했다. 비문은 이희승이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썼고, 조각은 김영중이 맡았다. 비용 130만 원 중 50만 원은 동아일보가 냈고, 나머지는 이 지역 유지들이 모금했다.
1970년대에는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전북 남원 등 전국 9개 지역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80년대에도 설립 사업은 계속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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