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쪽의 적은 분량에 날 선 통찰을 담는 실험은 계속된다.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의 새 저서다. 그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대인을 질타한 ‘피로사회’에 이어 ‘에로스의 종말’에서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엔 ‘타자’에 대한 고찰이다. 저자는 새 저서에서 이 시대에 타자가 없어졌다고 선언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낯선 존재’인 타자가 사라지고 비슷한 것들,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만 상대하면서 살아가게 됐다고 분석한다. 과거엔 타자와의 갈등이 삶에 대한 신선한 긴장을 갖도록 하고 획일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끌었지만, 현대의 개인은 타자를 소거하면서 ‘남과 다를까 봐 불안해하는’ 모습이 됐다는 것이다.
타자가 없는 이 시대에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현상은 테러와 셀카다. 저자가 보기에 세계를 위협하는 극단적인 테러리즘은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경향에 대한 극단적 반발이다. 저자는 민족주의와 신우익이라는, 얼핏 보기에 테러리즘과 대척점에 서 있는 현상들도 뿌리는 같다고 본다. 세계적인 것의 지배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셀카 역시, 비슷해지고자 하면서 내면의 공허함에 직면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시도라고 저자는 본다.
결국 한병철 교수가 보기에 타자는 사르트르가 얘기하듯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다. 고립과 허무로부터 벗어나고 자아와 세계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타자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는 유럽에 팽배한 난민 배척 현상을 짚으면서,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런 타자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환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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