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올드 이즈 더 뉴 뉴]괘종시계-턴테이블-타자기… 시간이 멈춘 동네 책방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6일 03시 00분


음악전문 서점 ‘초원서점’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초원서점’ 내부. 책장 위엔 세계문학전집, 난로 위엔 누런 놋쇠주전자가 앉았다. 타임머신 타고 숨은그림찾기 하러 온 기분이다. 뜻밖에 20, 30대 손님이 많다. 손님 김슬 씨(27)는 “영화 ‘쎄시봉’ 속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안웅철 사진작가(anwoongchul.com) 제공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초원서점’ 내부. 책장 위엔 세계문학전집, 난로 위엔 누런 놋쇠주전자가 앉았다. 타임머신 타고 숨은그림찾기 하러 온 기분이다. 뜻밖에 20, 30대 손님이 많다. 손님 김슬 씨(27)는 “영화 ‘쎄시봉’ 속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안웅철 사진작가(anwoongchul.com) 제공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댕, 댕, 댕…댕.

오후 3시 57분. 턴테이블 위에 걸린 작은 괘종시계가 네 번 울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시계에서 부리가 솟아 말하는 듯했다. ‘…여긴 애당초 시간을 잃어버린 곳입니다.’

26m² 공간 안엔 괘종시계, 구식 난로와 주전자, 턴테이블과 카세트덱, 용수철 모양 전화선이 달린 빨간 전화기, 낡은 책장 6개, 그리고 타자기…. 실내에 들어선 순간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1980년대 우리 집 거실로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아서다.

‘소금길’로도 불리는 서울 마포구 숭문16나길(염리동). 패스트 패션과 화장품 상점이 늘어선 이대역 네거리에서 고작 한 블록 도망쳐 온 것뿐인데 이 동네는 다른 세상이다. 현이양품, 맛나식당, 성희패션…. 정겨운 간판 몇 개를 지나 오르막길을 3분쯤 올라야 ‘초원서점’ 간판이 보인다. ‘서점 영업 중’이란 입간판 위로는 ‘뮤지션저서’ ‘음악역사’ ‘악보집’ 하는 글귀가 멋대가리 없이 쇼윈도에 붙어 있다.

○ 시간을 잃어버린 서점

이곳은 지난해 5월 개업한 음악전문 서점이다. ‘초원서점’(02-702-5001·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아이디: pampaspaspas). 절판된 김현식 유고시집부터 신간인 ‘핑크 플로이드의 빛과 그림자’까지 600여 종의 책 곳곳에 주인장이 낡은 마라톤 타자기로 친 소개 글이 붙어 있다. 인디 음반도 판다.

카세트덱에 붙은 턴테이블 위엔 김창완의 ‘기타가 있는 수필’(1983년) LP판이 돌고 있었다. 그 옆엔 나나 무스쿠리, 동물원, 박광현의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섰다. 테이프로 음악을 틀 때도 있다. 디지털 음원 스트리밍의 시대, 서른 즈음 김창완의 맑은 목소리가 먼지 사이를 떠다닌다. ‘시간의 고동소리 이제 멈추면/모든 내 방의 구석들은 아늑해지고…’(‘내 방을 흰색으로 칠해주오’ 중)

“촌스러운 이름으로 하고 싶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가게처럼요.” 이곳 주인장 장혜진 씨(사진)는 뜻밖에 1980년대 학번이 아니다. 1980년대생이다. 초원의 평화로움을 늘 동경했다는 그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초원사진관’ 같은 가게를 만들고 싶었다.

고개 넘어 다음 골목부턴 재개발 지역이다. 공사장의 거적이 휘날리는 폐허의 바다다. 그나마 재개발 전인 이쪽 동네엔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아니면 중국인들이 주로 산다. 떠나는 사람들이 골목 어귀에 버리고 간 탁자나 갓 달린 전기스탠드 따위를 주인장은 신줏단지 모시듯 초원서점에 들였다. “옛날 것 흉내 낸 새것 말고 진짜 옛날 것, 때 타서 예뻐진 것들이 좋아요.”

○ 독자엽서, 백일장, 통기타교실

이곳엔 동네 서점의 매력이 넘친다. 통기타 연주와 작사 수업으로 구성된 ‘초원음악교실’엔 매주 수요일 열 명 남짓의 수강생이 찾는다. ‘초원초대석’ 시간엔 저자나 평론가를 초빙해 음악을 함께 듣는다. 얼마 전엔 ‘제2회 초원백일장―나의 광석’을 열었다. 다음 달엔 노랫말 필사(筆寫) 모임이 시작된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오는 젊은 분들도 좋지만 동네 분들이 많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이 자리는 전에 구제 옷 창고로 쓰였다. 그 전엔 미용실이었다. “책 한 권 살 때마다 책갈피랑 독자엽서를 드려요.” 엽서엔 270원짜리 우표가 인쇄돼 있다. 책 산 사람이 간단한 서평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주인장에게 돌아온다. “책과 음악을 좋아했지 굉장한 꿈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서점은 없어지고 음식점만 즐비해지는 거리가 싫었어요.”

주인장은 4년간 종사한 카페 매니저를 관두면서 받은 약간의 퇴직금에 저금을 보태 창업했다. 자본금은 1000만 원도 안 된다. 지금 매출은 월세를 겨우 감당할 정도. 그래도 행복해 보였다.

‘초원서점 깜짝 선물 대작전… 염리동 주민 여러분의 낭만적인 순간을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가게 한쪽에 이벤트 공고가 붙었다. 책이나 음반을 사서 선물받을 사람 연락처와 함께 맡겨두면 주인장이 메시지를 발송한다. ‘보낸 이를 알 수 없는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그이가 초원서점을 방문하면 누군가 두고 간 선물이 전달된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괘종시계가 다섯 번 울었다. 4시 57분. 언젠가의 아이를 떠올렸다. 아파트와 학군 말고 동네와 골목에 휘날리던 그의 머리칼. 이제는 연락처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깜짝 선물을 남기고 싶어졌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음악전문 서점#초원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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