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나 미술사학을 학교에서 배운 일도 없고, 또 어느 선생에게 지도받은 일도 없습니다. 순전히 제 흥에 겨워 미술작품, 그것도 주로 전통회화를 소년시절부터 보고 다니고, 좋아서 미술사 사료나 미술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국제정치학자로서 전통회화에 밝았던 동주 이용희(1917∼1997)의 말이다. 그의 글과 강연, 대담 등을 엮은 책으로 ‘한국회화소사’ ‘일본 속의 한화’ ‘한국회화사론’ ‘우리나라의 옛 그림’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등이 있다.
내과전문의로 서울대 의대 교수였던 일산 김두종(1896∼1988)은 의사학(醫史學)과 서지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고서의 간행 연대와 판본, 인쇄 형태와 서체 등을 연구한 성과인 ‘한국고인쇄기술사’(1974년),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 의사학 논저인 ‘한국의학사’(1966년)가 그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본래 분야를 뛰어넘어 훌륭한 책을 남긴 사람들이 드물게나마 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재즈에 관한 글을 여러 편 썼다. 역사 관련 글과 함께 묶어 펴낸 책에서 재즈 부분만 따로 번역해 나온 책이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황덕호 옮김)이다. 그는 재즈의 민중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사회사 측면에서 재즈에 접근했다.
19세기 프랑스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전수연 교수(연세대)는 이탈리아 음악가 주세페 베르디를 각별히 애호하면서 ‘열렬한 베르디안’을 자처한다. 전 교수는 베르디 탄생 200주년이던 2013년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를 출간했다. 19세기 이탈리아 사회와 유럽의 현실을 배경으로 베르디의 삶과 음악세계를 풀어냈다. 역사학자로서 냉철한 시각을 유지하며 비판적 평가도 주저하지 않았다.
박혜일, 최희동, 배영덕, 김명섭 등 원자핵공학자 4명은 ‘이순신의 일기’를 펴냈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사료를 치밀하게 검토하고 의문점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박혜일 교수(서울대·2005년 작고)가 먼저 1970년대 초부터 연구에 몰두했고, 책은 1998년 초판이 나온 뒤 보완을 거듭하여 2016년 5번째 증보판이 나왔다.
전문성이라는 미명을 달고 있는 분야들 사이에 세워진 장벽들은 여전히 높다. 분야 간 융합이 대세라고 하지만 오래전부터 장벽 안에 쌓인 기득권이 만만치 않다. 경계를 넘나드는 저자들이 더욱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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