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땟물이 훤하십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인사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 얼굴을 찡그리거나 화를 낼 성싶다. 땟물 하면 ‘때가 섞여 있는 더러운 물 또는 때로 범벅이 된 땀이나 물기’를 떠올릴 테니. 하지만 놀라지 마시길. 땟물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자태나 맵시’라는 좋은 뜻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땟물을 말맛이 고약한 뜻으로만 알고 쓰면서 좋은 뜻의 땟물은 사전 속에 갇혀 버렸다.
좋은 뜻의 땟물이 입길에서 멀어진 건 아쉽지만 이를 대신할 말맛 좋은 말이 있다. ‘옷을 입고 매만진 맵시’를 뜻하는 ‘맨드리’다. “선생님은 맨드리가 있으십니다” “맨드리가 참 곱군요”처럼 쓰면 된다. 몸의 모양과 태도를 뜻하는 ‘몸맨두리’도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사전엔 맨두리라는 낱말은 없다. 몸맨드리 대신 몸맨두리를 표제어로 삼은 까닭이 궁금해진다.
‘표변(豹變)’도 언중이 낱말의 쓰임새를 바꿔 버린 예다. 이 낱말은 주역의 ‘혁괘(革卦)’에 쓰인 ‘군자표변 소인혁면(君子豹變 小人革面)’에서 왔다. 표범이 때때로 털을 갈아 아름다운 무늬를 간직하듯이 군자는 허물을 고쳐 말과 행동을 바르게 가다듬지만 소인은 좀처럼 잘못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표변은 처음엔 ‘긍정적인 변화’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이나 행동을 바꾸는 부정적인 뜻이 돼 버렸다.
분수(分數)에서 온 ‘푼수’도 표변과 닮은꼴이다. 이 말도 본래는 ‘얼마에 상당한 정도’ 또는 ‘상태나 형편’과 같은 긍정적인 뜻을 지녔다. 한데 지금은 주로 “야, 이 푼수야.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하고 다니면 어떡해”처럼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를 때 쓴다. 이는 푼수가 ‘푼수 없다’는 표현 형식으로 많이 쓰이게 되면서 ‘없다’가 지니는 부정적 의미가 푼수에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조항범).
언중은 한술 더 떠 ‘푼수데기’도 입길에 올린다. 푼수에 접미사 ‘-데기’가 결합한 형태로,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을 좀 더 낮잡는 말이다. ‘-데기’는 몇몇 명사 뒤에 붙어 ‘그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한다. 부엌데기 새침데기 소박데기에 쓰인 ‘-데기’도 그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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