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한식은 국물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8일 03시 00분


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겨우 열 살 남짓이었다. 타의로 ‘물에 만 밥’을 자주 먹었다. ‘물에 만 밥’의 의미를 미처 몰랐을 때다.

학교까지는 6km. 초여름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는 할머니만 계셨다. 부모님은 모두 들로 일을 나갔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의 늦은 점심을 챙겼다. 부엌 천장에 달아두었던 바구니의 보리밥을 챙겼다. 목이 메면 짜디짠 된장찌개를 입에 넣었다. 할머니는 불쑥 우물물을 보리밥에 부었다. “목이 멘다. 말아서 어여(어서) 먹어라.”

그게 싫었다. 할머니는 묻지도 않고 무턱대고 보리밥에 물을 부었다. “훌훌 먹어라”는 말을 덧붙이시면서. 우물물이 국물 대신이며, ‘물에 만 밥’이 한식밥상의 특질임을 몰랐다.

한식은 탕반음식이다. 한식밥상의 주인은 탕(湯·국)과 반(飯·밥)이다. 밥과 국이 밥상의 중심에 앉는다. 반찬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다. 우리는 평생 국물을 먹는다.

‘국물도 없다’는 표현이 있다. 국물도 없는 관계는 단절이다. 상대에게 베풀 최소한의 호의도 없다는 뜻이다. 국이 없는 한식밥상은 없다. 시래깃국, 김칫국, 쇠고깃국, 콩나물국, 미역국 등 어떤 국이라도 있어야 밥을 먹는다. 우리는 시금치, 아욱, 근대 등 모든 채소와 생선으로 국을 만든다. 된장국도 여러 가지고, 달걀과 두부도 국으로 끓인다.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가 라면을 먹지만,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민족은 드물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했다. 우리는 떡을 먹을 때도 국물을 먹는다. 일본에도 채소절임 음식인 쓰케모노(漬物)가 있지만 동치미, 열무김치처럼 국물 있는 절임음식은 없다. 우리는 배추김치도 국물이 자작하게 해서 먹는다.

예나 지금이나 출산하면 미역국을 먹는다. “너 같은 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느냐?”는 말은 참기 힘든 최악의 욕이다. 제사상은 한술 더 뜬다. 국이 있고 탕이 있다. 국도 여러 가지를 사용하고 더러는 맹물도 놓는다. 국이 없는 제사상은 없다.

흔히 음식을 나라별로 나눈다. 나라별 고유음식이다. 음식은 지구의 남방, 북방으로도 나눈다. 남방의 농경문화 음식과 북방의 유목문화 음식이다.

북방유목민족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침식사를 한 곳과 점심 먹는 곳이 다르다. 사는 곳도 일정치 않다. 번듯한 집이 있을 리 없다. 국물 음식을 마련하기도 어렵고 먹기도 번거롭다. 북방유목민족의 음식은 건식(乾食)이다. 식재료는 사냥, 목축을 통한 고기와 동물의 젖이다. 남방의 농경민족은 한곳에 정착한다. 집을 짓고 산다. 이동하지 않는다. 국물 있는 음식을 먹는다. 우리는 남방형 농경민족 문화다. 한국, 일본, 중국의 남부지역에서는 숟가락을 사용했다. 숟가락은 국물 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도구다.

숟가락은 기원전 5000년 중국에서 처음 나왔다고 알려졌다. 세 나라 모두 숟가락을 사용했지만 한국에만 숟가락 문화가 남았다. 중국과 일본의 숟가락 사용은 한정적이다. 국물음식도 한식에만 짙게 남았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한식밥상처럼 식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국물을 마시지 않는다.

숟가락과 국물. 마치 닭과 달걀처럼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한반도에만 숟가락과 국물이 남은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식의 국물 문화가 숟가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국물 없이 밥만 먹으면 목이 멘다. 슬픈 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입에 밥만 꾸역꾸역 넣는다”고 말한다. 국물 없이 밥만 먹는다고 표현한다. 국물이 없는 밥은 먹기가 힘들다. 국물을 한 숟가락 더하면 밥이 술술 넘어간다. 밥을 먹다 보면 더러 간이 맞지 않을 때도 있다. 맨밥에 국물을 더해 간을 높인다. 반찬이 너무 짜면 상대적으로 싱거운 국물을 더한다. 반찬의 짠맛을 국물로 희석시킨다. 국물은 밥 옆에 앉아 밥상을 조정한다. 국은 밥상의 조정자다. 국물은 한식의 특질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국물#한식#숟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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