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10월 30일 독일 미술가 케테 콜비츠(1867∼1945)는 전사 통지서 내용으로 그날의 일기를 대신했습니다. 열여덟 아들이 전쟁터로 떠난 지 20여 일 후, 전장의 아들이 첫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지요.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아이가 조금만 늦어도 애타는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그런데 전쟁터로 떠나보낸 아들을 기다렸을 미술가는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그런 와중에 전해 들은 전사 통보는 또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판화가는 쉽게 비극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울면서 죽은 아들 얼굴 조각을 시작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지요. 개인적 불행을 목판에 새기기로 결정하는 데 또 5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은 지 거의 10년이 가까워올 무렵 7개로 판화로 구성된 ‘전쟁’ 연작도 세상에 발표했지요. 치열한 전투 장면은 판화 연작에 없습니다. 앳된 지원병들과 전쟁 중 가족을 잃은 부모와 아내 등, 판화가는 전쟁 희생자와 남겨진 사람들의 비탄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었지요.
경험이 낳은 예술이어서일까요. 검은색과 몇 개의 정직한 선이 전부인 판화는 무거운 침묵과 깊은 슬픔을 전합니다. 특히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가린 남편과 웅크린 채 숨죽여 우는 아내가 등장하는 작품 ‘부모’는 비통하기 그지없습니다. 판화가는 개인적 고통을 자신만의 상처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라면 응당 모순투성이 현실을 주시하고, 형상화할 방향을 세운 후 진중하게 작업할 특권과 책임이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구체적 현실이 전제된 미술의 예술적 출발점으로 종종 성장 배경이 주목되기도 합니다. 판화가 외할아버지는 당대 교회의 권위에 저항한 신학자거든요, 또한 아버지는 노동자 삶을 택했던 변호사였고, 남편은 빈민촌에서 의료 구제 활동을 펼쳤던 의사였어요. 이런 가족들이 미술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겠지요. 하지만 판화가는 아들의 죽음이 자신 예술에 확신을 더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단언합니다.
‘부모 마음으로 해 달라.’
이별한 자식과 아직 못 만난 유족 대표가 세월호 인양에 앞서 힘겹게 골랐을 당부 표현이 가슴 아팠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적 미술가가 아닌 현실과 예술의 괴리를 좁히는 좋은 예술가를 표방한 미술가의 판화 속 부모를 떠올리며, 3년 동안 자식을 기다려온 그 부모 마음을 감히 헤아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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