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가극 ‘아리랑’ 작가 한유한을 아십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31일 03시 00분


中 톈진 ‘한중 관계 역사와 현황’ 국제학술회의서 집중 조명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한중 공동의 항일투쟁사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해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19일 중국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에서 열린 ‘한중 관계의 역사와 현황’ 국제학술회의에서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은 항일투쟁사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과 난카이대 한국연구중심은 이날 학술회의에서 고대사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유구한 교류사를 폭넓게 다뤘다.

이 중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아리랑’을 만든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유한(본명 한형석·1910∼1996·사진)의 삶이 눈길을 끌었다. 한유한은 중국학자에 의해 1998년에야 뒤늦게 존재가 알려졌다. 양지선 단국대 연구교수는 ‘아리랑을 통해 본 한유한의 예술 구국투쟁’ 논문에서 한유한의 항일 예술이 한중 공동항전에 끼친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한유한은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신화예술대와 국립음악원을 졸업했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국희극학회에 들어가 전선에서 병사들을 상대로 항일연극을 공연했다.

한유한이 우리의 독립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38년 중국 시안(西安)을 근거지로 둔 한국청년전지공작대(1941년 광복군에 편입)에 가입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중국 국민당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맡아 중국 측 지원을 이끌어냈다. 한유한은 동포들의 광복군 지원을 촉구하고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극 ‘아리랑’을 1940년 5월 시안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다.

1940년대 중국 현지에서 한유한의 가극 ‘아리랑’을 공연하는 장면. 부산근대역사관 제공
1940년대 중국 현지에서 한유한의 가극 ‘아리랑’을 공연하는 장면. 부산근대역사관 제공
음악과 연극이 결합된 ‘아리랑’은 목동과 촌녀 부부가 일본의 핍박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유한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와 얼후, 징, 북 등 동양 악기 20여 개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웅장한 소리를 냈다. 당시 출연진과 악단에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 예술가가 대거 참여해 한중 공동항전의 의미를 살렸다. 극중 곡들은 군가풍이 많았는데 클라이맥스에서는 아리랑이 연주됐다.

한유한은 본래 작곡과 연출을 맡았지만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 배우가 마땅치 않아 남자 주인공 역까지 해냈다. 공연은 매회 매진을 거듭한 끝에 기간이 연장됐고 장제스(蔣介石) 등 국민당 수뇌부가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1944년 3·1운동 기념과 중국군 부상병 위문 모금을 위해 개최한 제4차 ‘아리랑’ 공연 포스터.
1944년 3·1운동 기념과 중국군 부상병 위문 모금을 위해 개최한 제4차 ‘아리랑’ 공연 포스터.
양 교수는 “가극 ‘아리랑’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를 높여 한중 연대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당시 중국 측은 화북 지방에만 20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항일투쟁에 동원하고 싶었지만, 이들 가운데 친일세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일본어에 능하고 식민지 내부 사정에 밝은 한인들은 일본군 정탐 활동을 수행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양 교수는 “한인들 역시 일본에 침략을 당한 피압박 민족이며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는 데 가극 ‘아리랑’이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톈진=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중 관계 역사와 현황#한유한#항일 가극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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