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여행 전문기자의 休]사케 익는 마을, 일본의 ‘봄맛’이로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일 03시 00분


간사이 지방 술도가를 따라서

《봄이란 덧없다. 늘 그랬듯이 왔는가 싶으면 벌써 가버린 뒤라. 봄은 ‘보다’에서 왔다. 볼 것 없는 한겨울 끝에 드디어 볼만한 게 나타나니 그게 봄이란다. 아지랑이며 꽃이며 대지를 적시는 비와 얼굴을 간질이는 봄볕…. 그런데 일본엔 우리가 모르는 ‘봄’이 있다. 새 술이다. ‘니혼슈(日本酒)’의 통칭 사케(酒)라는 청주(淸酒)다. 이 술은 겨우내 빚어 새봄에 낸다. 햅쌀밥을 누룩에 비벼 달달하게 띄운 뒤 효모 넣고 물을 부어 발효시킨 쌀 술이다. 사케 양조를 겨울에 하는 이유. 잡균의 발호가 적어서다.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향, 혀를 쪽쪽 다시게 하는 맛은 그렇게 얻는다. 그렇게 새 술은 봄과 함께 온다. 그게 신슈(新酒·새 술)고 그게 일본의 봄을 더더욱 봄답게 만든다. 벚꽃 만개한 나무 아래서 맛난 ‘벤토’(도시락)를 안주 삼아 겨우내 균과 효모, 사람의 수고로 탄생한 새 술을 ‘보고 들이켤’ 호사가 기다려져서다. 그 사케의 발상지, 간사이(關西) 지방의 유서 깊은 술도가 순례 길로 안내한다.》
 
2001년 아키히토(明仁) 일왕(125대·재위 1989년∼현재)의 68세 생일 기자회견 석상. 일왕의 모계혈통이 백제계라고 밝혀 도래인(到來人·3세기경부터 일본에 건너온 한국인)에게 관심이 다시 모아졌다. “선조 간무 왕(50대·재위 781∼806년)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 자손이라 기록한 ‘속일본기’ 덕분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밝힌 것이다.

사람 가는 곳엔 술도 따른다. 일본 역사서 ‘고서기’(古書記·721년 집필)를 보자. 백제인 인번(仁番·일본 이름 ‘수수보리’)이 술을 잘 빚어 오진 왕(15대·재위 270∼310년)을 감동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케의 원류가 한반도임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나라(奈良)와 교토(京都) 사이의 사가(佐牙)신사(573년 창설), 교토 시내 신사 마쓰오타이샤(松尾大社)가 그 발상지로 추앙된다. 수수보리 같은 양조장인에 대한 제사, 도래인 진(秦)씨 일족이 신에게 헌상하는 술 양조를 전담했다는 기록이 그 근거다.

도지(양조장인)의 신사 오미와

양조장인 도지의 신을 모시는 오미와신사의 신전. 거대한 스기다마가 천장에 걸려 있다.
양조장인 도지의 신을 모시는 오미와신사의 신전. 거대한 스기다마가 천장에 걸려 있다.
간사이 술도가 순례여행길. 백제유민의 발자취부터 더듬는다. 첫 방문지는 오미와(大神)신사(나라 현 사쿠라이 시). 미와(三輪) 산(467m) 아래 5세기에 조성됐는데 사케 양조장인을 일컫는 ‘도지(杜氏)’의 신 오모노누시(大物主)를 모시는 곳이다.

술맛은 도지 솜씨에 좌우된다. 그런데 도지는 이 신에게 빈다. 신전의 현관 천장을 보자. 250kg짜리 초대형 스기다마(杉玉)가 걸려 있다. 삼나무 가지를 꽂아 공처럼 만든 스기다마는 양조장마다 내거는 양조의 상징. 11월 양조 개시 때 걸고 여름 들어 술이 떨어질 즈음 거둔다. 그게 갈색으로 변할 즈음 술이 떨어지는 것이다. 나라와 교토 일대 양조장 주인들은 이 신사 뒤편의 미와 산 삼나무로 만든 스기다마를 선호한다. 신의 도움으로 좋은 술이 나오기를 기도하며.

이나타 슈조의 술과 나라즈케

일본에 누룩을 전파했다는 백제인 수수보리. 그런데 지금은 나라즈케(奈良漬け) 같은 쓰케모노(장아찌류의 절임 음식)의 통칭이다. 술과 함께 전수된 도래인 고유의 음식이라서다. 덴리(天理) 시내 이나타슈조(稻田酒造)는 그런 역사를 보여준다. 사케와 나라즈케를 두루 만들고 있다. 나라즈케는 양조를 쉬는 한여름의 소일거리. ‘나라 절임’이란 이름은 그 발상지가 나라임을 강조하는데 그건 울외(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를 술지게미로 발효시킨 장아찌다.

이나타슈조의 이나타 미쓰모리 사장.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사쿠라이·덴리(나라 현)=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이나타슈조의 이나타 미쓰모리 사장.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사쿠라이·덴리(나라 현)=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덴리 시 지명은 천리교(天理敎)에서 왔다. 여기가 발상지다. 이나타슈조도 밀접하다. 천리교에 제주(祭酒)를 대기 위해 창업(1878년)했기 때문이다. 대표 브랜드 ‘稻天(이나텐)’의 ‘天’ 자가 그걸 말해준다. 양조장도 천리교단 본부 앞에 있다.

‘사케의 역사’ 게케이칸슈조

1000개의 주홍색 도리이(신사 입구의 상징 조형물)가 터널을 이룬 이나리타이샤(신사) 본사의 이 참배길은 그 독특한 모습으로 찾는 이가 많다. 이나리타이샤의 주신은 만사형통의 이나리 신으로 일본 전국에 3만 개나 산재한 이나리타이샤 중에 교토의 이 후시미 신사가 본사다. 후시미(교토 시)=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1000개의 주홍색 도리이(신사 입구의 상징 조형물)가 터널을 이룬 이나리타이샤(신사) 본사의 이 참배길은 그 독특한 모습으로 찾는 이가 많다. 이나리타이샤의 주신은 만사형통의 이나리 신으로 일본 전국에 3만 개나 산재한 이나리타이샤 중에 교토의 이 후시미 신사가 본사다. 후시미(교토 시)=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이어 찾은 곳은 이웃한 교토. 시내 한 중심 후시미(伏見) 구의 게케이칸(月桂冠)슈조다. 후시미는 사케 양조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후시미즈(伏水)’란 명수(明水)와 호리카와(堀川)라는 하천 때문이다. 그 복류수(伏流水·하천 바닥 아래 모래층을 흐르는 물로 표류수보다 깨끗함)는 부드러운 후시미 사케의 몸통. 지금도 인근 25개 양조장이 모두 이 물로 술을 빚는다. 호리카와는 후시미 성의 외호(外濠·성 바깥을 에두른 도랑)로 오사카(大阪) 시를 관통하는 요도가와(淀川)로 흘러든다. 그래서 철도 부설 전까지 교토와 오사카를 고속도로처럼 이어주던 수운(水運)의 무대. 상인도시 오사카까지 술을 쉽게 수송할 수 있었기에 후시미의 양조산업이 17세기부터 번창할 수 있었다.

게케이칸은 올해 창업 380주년(1637년)을 맞는다. 애초의 상호는 ‘오쿠라(大倉)’. 그래서 양조박물관 이름이 ‘게케이칸 오쿠라 기념관’이다. 그 건물은 1909년 지은 양조장으로 하얀 벽의 외관이 고풍스럽다. 게케이칸의 역사는 일본 사케의 역사다. 어지간한 ‘최초’가 다 여기서 나왔다. 미국 수출(1901년), 탈방부제(1911년), 병술(1931년), 왕실 공납(1919년), 연중 양조(1961년), 나마자케(生酒·효모를 죽이지 않은 술·1984년)에 전국신주감평회 최다 수상 기록까지. 기념관엔 그런 역사를 보여주는 400여 가지가 전시돼 있다.

게케이칸이 철도 승객을 위해 1910년 개발한 술잔 겸용 뚜껑의 소형 병사케.
게케이칸이 철도 승객을 위해 1910년 개발한 술잔 겸용 뚜껑의 소형 병사케.
그중 동그라미와 사선이 교차한 로고와 1910년 개발한 컵 대용 뚜껑 장착 병술이 눈에 띄었다. ‘조화와 혁신’을 상징하는 그 로고가 철도시대를 맞아 기차간에서 마실 수 있게 컵 대용 뚜껑을 붙인 사케 개발의 배경이었음은 물론이다.

이 기념관에서도 술을 빚는데 사케코보(酒香房)란 작은 시설에서 만드는 품평회 출품용 고급술이다. 양조장을 개조한 식당 쓰키노쿠라(月の藏)도 부근에서 운영한다. 기념관 골목은 에도시대 정취가 짙게 풍기는 일본 ‘역사가도(歷史街道)’의 일부. ‘일본을 지금 한 번 세탁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로 상징되는 일본 근대화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습격(1867년)받아 죽은 데라다야(寺田屋)도 길 건너편에 있다. 그래서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벚꽃 철엔 골목 바깥 호리카와 외호에서 뱃놀이가 성행한다. 교토의 봄을 만끽하기에 최고다.

사사야마의 단바토지와 호메이슈조

좋은 사케의 조건은 세 가지. 좋은 쌀과 미네랄이 적은 연수, 솜씨 좋은 ‘도지’(양조장인)다. 그런데 이걸 두루 갖추기란 어렵다. 그래서 솜씨 좋은 도지는 전국 양조장이 초빙해 간다. 효고(兵庫) 현 북부 산간의 단바(丹波)가 그런 곳이다. 이름하여 단바토지(丹波杜氏)다. 그 배경은 큰 일교차에 좋은 쌀로 맛있는 술을 빚어온 역사. 한 계절 외지로 나가 일하는 걸 ‘데 카세키’라고 하는데 이곳 단바토지에겐 한겨울 농한기의 짭짤한 수입원이다. 사사야마(篠山) 시의 ‘단바토지주조기념관’은 그런 양조 역사를 보여준다.

일본 사케 산업에서 효고 현은 그 정점이자 핵심이다. 양조량이 가장 많고 최상급 양조용 쌀 ‘야마다니시키(山田錦)’의 고향이라서다. 80년 전 나라 현 농업시험장에서 개발된 이 쌀은 최고급(일본주세법상) 다이긴조슈(大吟釀酒) 양조에 거의 필수가 된 품종. 다른 쌀과 달리 65% 이상 깎아내도 쌀알이 부서지지 않는다. 사사야마 등 단바 지역에서 주로 생산하는데 전량 계약재배로 공급된다. 단바토지조합이 운영하는 기념관엔 전통 양조기구가 전시돼 있다.

기념관이 있는 성터 외호에서 5분가량 걸으면 호메이슈조(鳳鳴酒造)가 있다. 고색창연한 양조장 건물엔 ‘조카쿠라(城下藏)’란 상점도 있다. 술과 도쿠리(사케용 술병) 오초코(시음용 잔)를 판다. 뒤편 양조장에서 특별한 술을 발견했다.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이 연주되는 탱크에서 숙성 중인 사케였다. 음률의 진동이 숙성에 작용했을 거라 생각하니 느낌이 좋았다. 근방 요시카와(吉川) 온천엔 ‘야마다니시키노사토(山田錦の鄕)’라는 이 쌀 전시관도 있다. 탄산 함량이 일본 최고의 염수온천이다.

간사이 지방(일본)에서 조성하 여행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 정보

나라: ‘Nara Audio Guide’ 앱(한국어)과 자원봉사 영어 가이드(eggnaraymca@hotmail.com) 제공. △관광협회: www.narashikanko.or.jp ◇오미와신사: www.oomiwa.or.jp ◇덴리 시: 닌켄 왕 재위기(488∼498년)에 잠깐 수도였던 교토 부의 북부. 천리교의 총본산이 여기다. www.city.tenri.nara.jp △이나타슈조: 사전 연락 시 견학 가능. 홈페이지(www.inaten.com)엔 덴리 시내 주점 안내정보도 있다. www.inaten.com

교토: ◇게케이칸 오쿠라 기념관: 관람 오전 9시 반∼오후 4시 반(입장은 오후 4시까지). 오본(8월 13∼16일·추석)과 연말연시 쉼. 유료(300엔). www.gekkeikan.co.jp

효고: ◇단바사사야마관광협회 tourism.sasayama.jp/association/ ◇단바토지주조기념관: 12∼3월의 토·일·공휴일, 12월 28일∼1월 4일 쉼. ◇호메이슈조: 수요일 쉼. www.houmei.com ◇야마다니시키노사토: 무료 체험 아시유(발온천탕)도 있다. www.76-2401.com
#간사이 지방 술#사케#나라즈케#쓰케모노#게케이칸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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