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동일한 재료와 조리법의 음식을 매일 한 끼 정도 만들어 먹는다. 조리대 앞에서 신경 쓰는 건 두 가지다. 설거지거리가 가급적 적게 나오도록 할 것과 그럭저럭 다양한 성분을 포함시킬 것. 요리라고는 할 수 없는, 그냥 대강 끼니 때울 만한 한 그릇이다.
주방 일을 좋아해서 붙인 습관이 아니다. 혼자 식사한 후의 설거지는 아무리 익숙해져도 늘 우울하다. 그럼에도 굳이 어설픈 식탁을 차리는 까닭은 하나다. ‘먹는 이를 살펴 조리한 음식’을 만나기가 갈수록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의 이름이 불러주는 이로 인해 의미를 얻듯 어떤 음식의 가치는 먹는 이로 인해 완결된다. 하지만 ‘주는 대로 불평 없이 잘 먹는 식성’이 어여삐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서 식탁의 주도권은 먹는 이가 아닌 만드는 이 쪽으로 은근히 기울어 있다.
먹는 이의 기쁨까지 고려할 여유가 없을 만큼 요식업 환경이 열악한 건 맞다. 그러나 가격과 품질의 상관관계가 희미한 걸 보면 환경 탓만은 아니다. 음식의 형상을 한 정체불명 접시에까지 베풀 만한 인내의 여유가, 내게도 없다.
짤막한 여행을 떠나며 급히 챙긴 신간 한 권을 비행기에 앉아 열 쪽도 못 넘기고 다시 접어 넣으며 생각했다. 깔끔한 디자인의 표지 속에 가득 박힌 오자투성이 문장. 이 책을 만든 이는 읽는 이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한 걸까. 무성의한 칼질과 선도 낮은 재료를 두툼한 양념 범벅으로 덮은 냄비요리가 떠올랐다.
뭐든 쉽사리 만들어지는 시대다. 수용자를 살피지 않고 만들어지는 모든 건 그저 수고로울 뿐인 헛바퀴다. 버터 한 조각을 추가로 부탁해 보면 식당의 수준을 대략 알 수 있다. 짤막한 글, 얇은 책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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