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쓴 희곡 6편을 내리 읽었다. 언제나 울림을 주는 단어를 만났다. 맨 마지막에 쓰여 있는 한 글자, ‘막’이라는 단어였다. ‘끝’을 ‘막(幕)’이라고 쓰는 장르는 연극이 유일하다. 그러나 ‘막’이라는 말은 직접 연극을 관람할 때는 접할 수 없고, 희곡을 읽어야만 만날 수 있다. ‘막’이라는 글자는 내게 “어때? 괜찮았지” 하는 극작가의 뿌듯함과 안도로 다가오기도 하고, “근데, 통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초조로도 읽힌다. 그런데 일생동안 한 편이라도 희곡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 ‘막’이란 글자까지 읽었다는 것은, 극작가에 대한 내 나름의 헌사다.
내가 읽은 그의 희곡은 ‘시동라사’(2006년) ‘연변엄마’(2011년) ‘달나라연속극’(2012년) ‘뻘’(2012년) ‘목란언니’(2012년) ‘썬샤인의 전사들’(2016년)이다. 데뷔작인 ‘시동라사’부터 ‘썬샤인의 전사들’까지 10년밖에 안 걸렸다. 그러니 이 작가는 젊은 게 틀림없다. 그렇다. 그는 올해 40살이 됐다. 첫 작품부터 주목을 받았고, 이때껏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극작가 김은성이다. 3월 22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유명작품을 저본(底本)삼아 새로운 작품을 써내는 재창작 분야와 오리지널 창작 분야, 양쪽 모두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먼저 재창작에 대해 물어봤다.
“재창작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기대하지 않던 대답을 듣는 것은 인터뷰어의 큰 기쁨이다.
“재창작을 하게 된 것은 연극 공부를 시작할 때 서구의 명작들을 읽으면서 한국적 상황에 맞춰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저렇게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공연이 원작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컸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외국 작품을 한다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명작을 무대에 올리려면 컨템퍼러리하게(동시대적으로) 연출가가 재해석을 해주거나, 작가가 재창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1945년 초연)을 처음 읽을 때부터 ‘매우 한국적’이라고 생각했고, 이 작품을 ‘달나라연속극’으로 재창작해 호평을 받았다. 미국 대공황기에 몰락하던 중산층을 따뜻한 투명 필름을 통해 보여주는 듯한 ‘유리동물원’은 그의 자판을 거쳐 서울 이문동 다세대주책의 옥탑방에서 벌어지는 ‘달나라연속극’으로 바뀌면서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또 있다. 그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아저씨’를 아직 섬이었던 서울 잠실에서 농사를 짓는 노총각 ‘순우삼촌’(2010년)‘으로, 같은 작가의 ’갈매기‘를 1981년의 전남 벌교로 가져와 광주민주화운동을 가미한 ’뻘‘로, 세르비아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날의 전남 보성으로 데려와 좌우대립으로 녹여낸 ’로풍찬 유랑극단‘(2012년)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는 ’분명‘ 그 방면에 재주가 있는 것이다.
그는 재창작에 대해 “원작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 존재하고 있는 것들, 소중한 것들을 재미있게, 쉽게 재해석함으로써 원작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초연한 ’함익‘(김광보 연출)은 미묘하다. ’햄릿‘을 재해석한 것까지는 맞는데 원작의 본질에 다가갔다고 봐야 하는지는 의문이어서다. 그래서 재창작, 각색, 창작 등 규정이 다양하다. 시대, 인물, 배경을 비트는 것은 흔한데 그는 햄릿을 남자가 아닌, 재벌2세 여교수로 바꿔버렸다. 김은성은 햄릿의 여성성에 주목했다고 하나, 글쎄? 나는 창작 이라고 본다. 햄릿과 함익의 관계는 호기심을 자극해 관객을 극장으로 데려오는 데까지만 유용한 것은 아닐지.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함익이 아버지의 권력을 증오하면서도 어느새 본인이 똑같은 사람으로 변해 버린데 대한 자기혐오감도 작품을 이해하는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함익은 세 가지 갈등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자신과 자신, 자신과 가족, 자신과 외부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함익에게 장악당한 듯하다가 결국은 함익에게 반발하는 대학 연극반과의 갈등을 중시한다. 김은성은 ’자기혐오감‘에 관한 나의 문제제기에 동의하며 “그게 그녀가 자살하는 근거의 전부”라고까지 했다. 그렇다면 원래 타자에 대한 복수가 테마인 햄릿과는 달리, 함익은 자신에 대한 복수로 방향을 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은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온 “사느냐, 죽느냐”라는 대사를 함익 자신의 문제로 치환한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라는 대사로 바꿨을 것이다.
내가 햄릿과 함익에 대해 이런, 섣부르지만 강한, 주장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쩌면 햄릿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해체해서 재구성한 것이 1976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 ’하멸태자‘(번안·연출 안민수)일 것이다. 당시 공연을 관람했던 나는 매우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평단에서는 ’새로운 이정표‘라는 찬사와 ’국적불명‘이라는 비난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그때는 원작의 서사구조는 존중하면서 인물과 장소만 한국적으로 바꾸었는데도 그랬다. 그 후 40년 간 햄릿은 한국에서 수없이 해체됐고 지금도 수없이 재구성되고 있다. 요즘의 햄릿은 ’하멸태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멀리 와 있다. 김은성의 함익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니 햄릿을 모티브로 삼았다고는 하나 햄릿의 편린을 찾기 힘든 작품에 ’창작‘이라는 말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을 영국 궁중을 배경으로 한 왕과 귀족간의 갈등구조로 바꾸고, 영국적 사랑과 영국적 효, 영국적 형제애로 변주를 해서, 영국의 전통 복장을 입고 공연한다면 이것은 재창작인가, 창작인가. 이런 의문이 함익을 창작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재창작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런 그가 재창작에 대해 “별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은 의외다. 앞으로는 창작에 더 몰두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던진 낚싯바늘에 선선히 걸려줬다. 그래도 재창작하고 싶은 작품이 있지 않겠는가. 그는 선뜻 헨릭 입센의 ’사회의 기둥들‘(1877년 작)이라는 작품을 꼽았다. 김미혜 교수의 번역으로 2014년 국내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하겠으나 소위 ’사회의 기둥들‘이라는 사람들의 배신과 욕망, 부도덕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유리동물원‘ 이상으로 ’한국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미스터리 요소까지 들어 있으니 금상첨화다(그래서 그의 ’촉‘이 작동했겠지만 언제 재창작할지는 미지수다).
그의 창작은 위에서 언급한 ’시동라사‘ ’연변엄마‘ ’목란언니‘ ’썬샤인의 전사들‘이다. 이중 ’시동라사‘는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할 당시 졸업공연을 연출하기 위해 쓴 작품인데, 그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됐다. 극작가 김은성의 탄생이다. 당시 이 작품의 심사를 맡았던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신춘문예 응모작치고는 너무 수준이 높아서 당선자에게 큰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연극평론‘ 2012년 여름호, 3월 28일~4월 22일 두산아트센터 공연 ’목란언니‘의 팸플릿에서 재인용).
’시동라사‘는 강원도 홍천의 시동(詩洞·가상의 마을)에 있는 ’시대낙오적인‘ 라사점(맞춤양복점)을 운영하는 재봉사가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나중의 다른 세 작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시동라사‘의 테마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뒤의 세 작품은 사라져야 할 것에 대한 분노가 테마다.
’연변엄마‘는 연변에서 딸을 찾으러온 53세 조선족 복길순의 슬픔과 고통을, ’목란언니‘는 한국 사회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26세 탈북 여성 조목란의 좌절을, ’썬샤인의 전사들‘은 1940년부터 최근까지 비극적인 사건에 노출된 소년 소녀들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 질곡의 역사를 증언한다. ’썬샤인의 전사들‘에 대해서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내린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답을 내리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세월호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썬샤인의 전사들‘은 작중에서 주인공의 딸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드라마다).
나는 세 작품의 공통점을 ’동시대성‘ ’짙은 그늘‘ ’시선의 차가움‘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의 김은성을 규정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동시대성‘은 세 작품 모두가 오늘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짙은 그늘‘은 오늘의 문제 중에서도 유독 불편한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며, ’시선의 차가움‘은 비극적인 사례를 극대화함으로써 지금의 우리 사회에 비판적인 칼날을 들이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보여주는 계급성이 온화하다는 평도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를 극(劇)으로 드러낼 때, 주제의식에 있어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것” “예술가는 시대의 그늘을 향해 일어서는 사람” “연극은 지독할 정도로 추악한 인간의 본성까지 수용해 낼 수 있는 장르”라고도 했다. 내가 그를 보는 시각과 그가 자신을 보는 시각이 별반 다르지 않다. 작가는 이들 작품을 통해 주인공의 불행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행을 몰고 온 집단적 폭력과 사회적 구조, 시대의 광기를 고발하고 싶은 것이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얘기다.
그의 작품을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하려는 데 대해 그는 대체로 수긍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를 인터뷰한 기사는 작품에 대한 의견을 묻거나 작품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많다. 그래서 상찬이 많고,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나 나는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인터뷰하는 것이니 다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왜 오늘의 문제를, 그렇게 어두운 시선으로, 그토록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인가.”
그는 웹진 ’연극in‘에서 ’김은성의 연극데이트‘라는 코너를 맡아 2년간 42명의 연극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도 이 코너에서 연극 작품보다는 연극인에 포커스를 맞춰 호평을 받았으니 내 질문을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다(그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꾸준히 해본 것은, 즉 규칙적인 생활을 해본 것은 이 일이 처음이라고 했다).
내 예상은 맞았다. 그는 답했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의 성장 과정이 여러모로 힘들었다. 가족의 불화와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린이에게는 좋은 교육 환경이 아니었다. 세상을 안 좋게 보며 자랐다. 중학교 때부터는 한국현대사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일찍부터 사회와 계급성, 정치적 불합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그러면서 그는 “중심보다는 외곽에 있으면서 관망하거나 분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를 본인은 ’변두리기질‘이라고 했다.
김은성은 전남 보성에서 아버지가 라사점을 경영하는, 먹고 살만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얼마 안가 가세가 기울며 초등학교 3학년 때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면목천 뚝방 옆 다세대 주택가의 이모 집에 얹혀살며 일찌감치 어른들의 세계에 노출됐다(그는 비록 10년 밖에 보성에서 살지 않았지만, 전라도 말과 전라도 정서를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극작가라는 평가도 받는다).
나는 “자연인 김은성은 ’변두리기질‘이 맞는 것 같은데, 작품에 투영된 김은성은 오히려 중심으로 파고드는 ’반골기질‘에 가까운 것 같다”고 했다. 이는 인상 비평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읽고, 보고, 분석하고 내린 내 나름의 결론이다. 그래서 “당신의 반골기질은 진짜인가”라고 물었다. 작품에서만 반골인 척 하는 것은 아니냐는, 대단히 실례되는 질문이었다.
“쓴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깨닫지 못하면서도 막 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사소한 편지도 책임을 지는데 지금껏 나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작품과 위배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앞으로 잘 할 수 있을지는 걱정이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가 성장 과정을 숨긴 적은 없다. 여러 인터뷰에 나와 있다. 그러니 ’처음‘이라는 것은 그런 성장 과정이 자신의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인정한 게 처음이라는 뜻이다. 나는 특정 작가가 갖고 있는 사고 체계나 가치관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다만, 나는 그가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있고, 그 사실을 밖으로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여유를 갖고 있음은 확인했다. 인터뷰어의 역할은 거기까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작가란 아니라는 사실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말도 했다. 소설가나 시인 중에는 타고난 글쟁이들도 꽤 있는데, 본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로서는 겁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여기서 겁이 많다는 것은 작품의 주제가 선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앞서 지적했듯 그의 작품은 주제가 분명하고, 매우 비판적이다. ’겁이 많다‘는 것은 작품을 낼 때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2011년 첫 번째 희곡집 ’시동라사‘를 낼 때 ’겁 낼 줄 아는 작가가 되겠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겁이 너무 많아진 것 같다.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하고, 너무 많이 조사를 한다. 내가 이렇게 쓰면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할 지를 너무 의식한다. 작가는 작품 세계에 좀더 몰입해서 감각적, 직감적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썬샤인의 전사들‘에는 논문 수준의 주석이 달려 있다. 그는 “’썬샤인의 전사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쓰겠다고 작심하고 썼다”고 했다. 작가 김은성은 분명 “내가 이렇게 조사를 철저하게 해서 썼으니 이 연극은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가 최고의 연극으로 꼽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과부들‘은 칠레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저항을 그린 연극이다. 그렇지만 도르프만은 이 연극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부당한 죽임을 당했는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10여명의 과부들이 나와 자신의 이야기만을 할 뿐인데도 정권의 잔혹함과 저항의 숭고함을 웅변한다. 연극의 힘은 통계와 조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극적 서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나와 남에게 쓰기로 약속한 2편의 작품을 마무리하면 혁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작품, 즉 내용이나 형식이 모두 엄청나게 과감한 작품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본인과 쓰기로 약속한 작품은 치밀한 소재를 갖고 근사한 명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혁명적인 작품에 도전했다가 망해도 먹고 살수 있게 그 전에 준비를 해두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작품과 생활, 양쪽에서 준비를 잘 해 둬야 극작가라는 직업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성공한 극작가도 생활을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그동안 그는 대산문화재단 창작기금(연변엄마),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 두산 연강예술상,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육성프로그램‘ 지원작가, 동아연극상 희곡상(목란언니),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목란언니), 차범석 희곡상(썬샤인의 전사들) 등을 수상했다).
그가 말한 ’혁명적인 작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4월 1일 두산아트센터에서 ’목란언니‘의 재공연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서 거칠게나마 다음 작품의 구상을 밝혔다.
“정치에서 화합을 말하지만 잘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에서 먼저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입은 만만찮은 상처와 균열을 따뜻하고 진취적인 스케일로 표현하고 싶다. 하나는 만주벌판, 미 대륙 등에서 돈키호테처럼 독립운동하는 인물이 떠오르고, 다른 하나는 씨앗 하나가 큰 나무로 자라나는, 잡초 같은 인물이 떠오른다. 하나는 시야를 멀리 두는 것이고, 하나는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다. 너무 정치적인 것은 이제 지겹다.” 실제로 그런 작품이 나온다면, 그의 작품 세계는 2기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은성은 “앞으로는 대본을 아끼겠다”는 말도 했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은 주로 전인철, 부새롬이 연출했다. 부새롬과는 2011년 ’달나라동백꽃‘이라는 극단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실질적 극단 운영은 부새롬이 맡고 있고, ’변두리 기질‘이 있는 그는 주로 뒤에서 기획을 한단다.
“앞으로는 어떤 연출가를 상정하고 글을 쓰거나, 아니면 서너 명의 연출가가 완성 대본을 보고 서로 ’너무 너무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의 작품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나도 정말 열심히, 재미있게 써서 대본을 뜨겁게 대하는 연출가에게 줘야 할 것이다.”
그가 연극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복잡하다.
우선 마이너 리그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가 자신을 아직도 무명작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설과 추석에 가족들을 만나는데 그때마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일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가족들이 ’썬샤인의 전사들‘은 ’태양의 후예‘ 같은 거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처음으로 미국에 갔다 왔는데 동포들의 관심은 온통 ’도깨비‘라는 드라마였다. 그걸 쓴 작가가 마침 내 이름과 비슷한 김은숙 씨였다. 연극과 드라마는 다른 가치를 가진, 다른 장르라고 위안을 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속으로 ’너는 왜 하필 희곡을 쓰기 시작했니‘라고 물을 때도 있다.”
그러나 연극의 가능성도 부인하지 않는다.
“연극이란 장르는 이 시대에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돈이 안 된다는 말이다. 역설적으로 독립적인 예술이다. 눈치 안 보고 팍팍 쓸 수 있다. 좀더 거칠게 쓸 수도 있고, 민망하게 왜 그런 얘기를 꺼내, 하는 테마까지도 쓸 수 있는 적당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못해서 인기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장르와 다를 뿐이다. 마이너라고 초라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마이너이기에 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에서 나는 그가 주제의식을 강하게 내 보이는 이유를 짐작한다. 그는 연극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활용할지, 이 시대의 극작가는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몇 번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나의 정신적 멘토는 소설가 윤흥길 선생이다. 그를 보면서 힘든 역사를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넌지시 갈 길을 제시하는 것이 작가와 예술가가 할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극작가가 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뜨거움을 재미있게 풀어낸 이야기꾼‘이라고 새겨지길 기대한다.
그에게 자신의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꼽아달라고 했다. 딱히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있다. ’시동라사‘에서는 재봉사의 스승이 말했다는 ’옷에는 지문이 있어야 한다. 옷에는 사연이 깃들어야 한다‘는 대사가, ’목란언니‘에서는 돈을 줄 테니 국회의원의 자서전을 소설처럼 써 달라는 주문에 소설가인 허태양이 “니들은 소설을 가질 수가 없어. 왜냐? 니들 인생에는 모티브가 없으니까”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썬샤인의 전사들‘에서는 스승인 송시춘이 소설가이자 주인공인 한승우에게 (숱하게 많은 비극과 곡절이 있었던 것은) ’니보고 쓰라고 기란 기다. 니 작가 만들라고 그런 일들이 있었던 기다‘라고 하는 대사가 단연 기억에 남는다. 김은성은 “이 대사는 소설가 송기원 선생이 실제로 나에게 한 말에서 빌려왔다”고 말했다. 김은성의 외할머니는 보성 장터에서 좌판을 열었는데 그 옆에서 장사하던 분이 바로 송 선생의 어머니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전남 담양의 ’글을 낳는 집‘에서 송 선생을 만났을 때 얘기를 나눠보니 송 선생도 김은성의 집안 내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김은성이 술에 취해 신세 한탄을 하자 송 선생이 “너보고 쓰라고 그랬나보다”라고 말했고, 그는 그 말을 ’썬샤인의 전사들‘의 말미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김은성 특유의 장난기를 여러 곳에서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전남 보성이나 아버지의 가게인 라사점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함익‘과 ’썬샤인의 전사들‘에는 고급횟감의 대표격으로 똑같이 요코하마 출신 주방장이 내놓는 ’이시가리(줄가자미)‘를 등장시킨다. 또 ’썬샤인의 전사들‘에 나오는 대사 중 일부는 ’뻘‘에서 가져왔고, ’함익‘에 나오는 햄릿 문고판은 실제로 그가 입대할 때 가져가 애지중지하던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일종의 ’보물찾기‘라고 했다. 실제로 그런 것을 알아채 질문하는 관객도 있다고 했다.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모티브에 관한 이야기다. ’썬샤인의 전사들‘에서는 누구나 알 수 있듯 죽은 자에게서 산 자로 전달되는 ’수첩‘이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모티브다. 수첩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연변엄마‘에서는 ’손수건‘이 그렇다. 자신의 눈물을 닦기에도 힘든 복길순이 다른 사람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장면이 7번이나 나온다. 이 손수건은 결국 배신당하는 선의의 상징이 아닐까. ’목란언니‘에서는 조대자가 갖고 있는 쇠망치가 관심이다. 김은성은 이 망치에 대해 잘못된 산업화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도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김은성은 북한학과를 다니다 극작가가 됐다. 그 경험은 ’연변엄마‘와 ’목란언니‘에 투영됐을 것이다. 그의 진로 수정은 한국 연극계에는 잘 된 일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가 더 큰 극작가가 되려면 본인이 말하듯 스타일보다는 스토리에 더 천착해야 하고, 기술보다는 영혼에 더 치중해야 할 것이다. ’영혼‘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름이 ’철학‘이라면 ’철학‘도 가져와야 한다. 그가 정말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날? 그의 작품을 외국인 작가가 재창작하는 날로 정하면 어떨까. 그는 2012년에 펴낸 작품집 ’목란언니‘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기필코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
(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죽도록죽도록‘ ’시동라사‘ ’순우삼촌‘ ’찌질이신파극‘ ’연변엄마‘ ’달나라연속극‘ ’목란언니‘ ’뻘‘ 로풍찬유랑극단’ ‘뺑뺑뺑’ ‘앞집아이’ ‘썬샤인의 전사들’ ‘함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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