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영 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 씨 주변의 여자였다.―‘82년생 김지영’(조남주·민음사·2017년) 》
친구 A는 딸을 낳고 3개월 만에 복직했다고 했다. 육아휴직은 없었다. 부른 배가 채 다 들어가기도 전이었지만 그 전과 다를 바 없이 야근이 이어졌다.
내 기억 속 A는 남색 교복 재킷과 끈 리본, 하얀 얼굴이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 지독했던 대입 수험 기간에도 잘 웃었고 명랑했다. 공부도 잘하고 의리도 있었다. 그런 A, 아직 서른이 안 된 A가 얼마 전 “이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토해내듯 말했다. 당차고 자신감 넘치던 A는 아이를 임신하고 자신의 모습이 변해 가는 걸 보며 무서웠다고 했다. 딸은 귀여웠다. A는 필사적이었지만, 결국 가정과 직장 양쪽에서 갈팡질팡하며 상처를 받았고 죄인이 됐다고 했다.
책에 나오는 1982년생 김지영 씨는 우리 주변의 30대에서 가장 흔한 여성의 모습이다. 실제 1982년에 태어난 여성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 김지영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평범한 초등학교, 공립 중·고등학교, 대학 인문학부를 갔다. 홍보대행사에 취직해 일을 하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뒀다.
그런 김지영 씨의 입에서 어느 날 갑자기 친정 엄마의 말투가 튀어나온다. 남편도 사위 대하듯 하고, 몸짓도 어머니의 것을 따라한다. 또 어느 날은 딸처럼 아기의 행동을 한다. 사고로 죽은 동아리 여자 선배가 되기도 한다. 결국 시댁 식구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김지영 씨는 시어머니에게 “사부인”이라고 하다 남편에게 끌려나오기에 이른다.
의학적으로는 해리장애 증상에 가깝지만, 책에는 직접 진단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김지영 씨의 ‘빙의’는 동 세대를 함께 지나온, 혹은 지나고 있는 여성들에게만 국한된다. 평범한 삶의 궤적 곳곳에 상처와 부당함이 있었지만 아는 채로, 혹은 모르는 채로 지나온 이들의 목소리였다.
나는 친구 A에게 몇 번이고 이 책을 빌려줄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서른 중반의 김지영 씨보다 나와 A의 앞길이 조금은 더 나아질 거라 믿고 싶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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