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촛불’ ‘접동새’ 등으로 잘 알려진 후백(后白) 황금찬 시인이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현역 문인 가운데 최고령으로 활동해 온 시인은 강원 속초시 출신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써 ‘동해안 시인’으로 불렸다.
‘현장’ ‘오월나무’ ‘나비와 분수’ ‘오후의 한강’ ‘호수와 시인’ 등 시집 39권과 ‘행복과 불행 사이’ 등 수필집 25권을 펴내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40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고인은 지난해부터 거동이 불편해졌지만 시집 출간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집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신달자 시인은 9일 “곁에 있는 이들을 늘 웃게 만드셨고, 맑은 영혼을 지닌 영원한 시인이셨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기분이 좋을 때면 동요 ‘봄이 오면’을 즐겨 부를 정도로 아이 같은 고운 성정을 지녔다는 게 시단 후배들의 전언이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성장했고 1939년 문학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부두 노동을 하며 번 돈으로 일본 다이도(大東)학원을 다녔다. 4년 후 성진으로 돌아온 고인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6·25전쟁으로 월남한 뒤에는 강릉농업학교, 동성고교 등에서 국어교사를 지냈다.
1947년 월간 ‘새사람’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강릉에서 ‘청포도’ 동인을 결성했고 이듬해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문예’로 등단했다. 박목월 박두진 피천득 등 시우(詩友)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도 홀로 시집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오랜 기간 해변시인학교 교장으로 활동했고, 각종 TV 교양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해 문학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다.
후배 문인들에게도 깊은 존경을 받았다. 지난해 열린 백수연(白壽宴·99세 생일잔치)에서 제자와 후배 문인들로부터 고인의 시 2018편이 담긴 필사집 ‘그리움의 노래’를 헌정받았다.
빈소에는 8일부터 이근배 성춘복 허영자 홍금자 등 시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김문정 시인은 “선생님은 ‘시인은 하늘의 별이 되어야 하고, 하늘의 눈으로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던 선생님이 생전에 애틋하게 여기셨던 시 ‘어머님의 아리랑’에서처럼, 어머니와 함께 진달래를 따기 위해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이 시에서 ‘어머님은/봄 산에 올라/참꽃(진달래)을 한 자루 따다 놓고/아침과 점심을 대신하여/왕기에 꽃을 담아 주었다’며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2015년 황금찬문학상이 만들어졌고, 고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문화훈장보관장 등을 받았다.
장례식은 빈소가 마련된 서울성모병원에서 11일 오전 8시 반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장은 성춘복 시인, 사회는 이애진 시인이 맡았다. 홍금자 시인이 고인의 연혁 보고를 하고, 최규창 시인이 조시를 낭독한다. 김문정 시인이 ‘어머님의 아리랑’을 낭송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도정 누리목장 대표, 도원 윈드로즈 대표, 애경 씨 등 2남 1녀가 있다. 장지는 경기 안성시 초동교회묘지. 02-2258-5940
▼ 봄꽃처럼 활짝 핀 한글사랑… 천국에서도 그 뜻 펼치소서 ▼
이근배 시인 추모사
지금 이 나라 산천은 꽃 만발입니다. 선생님의 모국어 사랑, 한글 사랑이 꽃과 더불어 활짝 피어나던 이 봄날 아침에 선생님은 홀연히 붓을 놓고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색동옷 입은 제자들이 부르던 선생님의 시 ‘어머님의 아리랑’이 이 산 저 산 소쩍새들의 울음으로 들려옵니다.
나라 뺏긴 지 여덟 해 만에 태어나시어 여섯 살 때 할아버지가 가솔을 데리고 북간도 망명길에 가다가 함경북도 마천령 용소골에서 머물러 사셨지요. ‘10분의 4는 집을 닮고 그 남은 6은 토굴’이었던 집에서 어머님의 아리랑은 함께 살아온 온 겨레의 아리랑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리 시대의 노래입니다.
‘한글/그 글자 속엔/어머님의 음성과 아버님의 음성이 숨 쉬고 있다’(시 ‘한글’)고 하셨듯이 일찍이 한글의 얼이 곧 나라의 얼임을 깨달으셨습니다. 1947년 월간지 ‘새사람’에 등단하셨으니 올해로 회방년(回榜年·등단 60년)을 넘어 시력으로 고희를 맞으시는 해이기도 합니다.
후백 선생님! 선생님은 책 읽는 법, 글 쓰는 법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말씀으로 또는 품성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남달리 몸에 배기도 했지만 저의 눈에는 선생님의 풍모에서 예수만이 아닌 공자도 석가도 함께하심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저의 졸시 ‘겨울자연’을 칠판에 써놓고 모두 외우라고 하셨죠. 그러고는 저를 만나면 “이 선생, 이제 시 그만 쓰세요. 그 시 하나면 됩니다” 하며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어찌 저에게뿐이겠습니까. 선후배 시인 모두에게 선생님은 늘 덕담을 해주셨고 따르는 후학들에게는 큰 스승이자 친구이자 연인이셨습니다.
해마다 섣달이면 시낭송 모임 뒤풀이에서 소주 한 잔을 올리곤 했습니다. 재작년 뵈올 때 제가 이백수(二白壽) 상수하시라고 제자들에게 박수 치게 한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손이라도 잡아보는 것인데….
후백 선생님! 가시는 하늘나라에도 꽃들은 피겠지요. 입술이 파랗게 먹던 참꽃(진달래)도 있겠지요. 부디 그 나라 산천에 일백 년 모국어 사랑! 더 높고 더 긴 강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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