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문명의 정점에 공원이 있다. 높은 건물, 효율적 교통망은 그 전 단계의 과제다. 도시를 채워 나갈수록 일부를 비워 낼 필요가 늘어난다. 아무 곳이나 비워 낸다고 되는 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누구나 채우고 싶어 하는 곳’을 비워야 가치가 커진다. 그래서 공원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성숙한 사회가 아니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공원은 보자기처럼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을 느슨하게 감싼다. 여기서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대부분의 공원은 돈을 낼 필요도 없다. 남에게 방해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일을 얼마든지 느긋하게 할 수 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공간이다. 숱한 시와 소설, 음악과 그림, 그리고 사업 아이디어가 공원에서 시작된다. 언뜻 그냥 다들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의 에너지로 충만한 곳이 바로 공원이다. 이곳에는 도약 전의 이완이 있다.
“외할머니는 어린 나를 이곳으로 자주 데리고 와서 오리에게 먹이를 주었다. 아늑하지도 한갓지지도 않았지만 신록이 우거진 이곳이 나는 좋았다.”
공원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18명의 글을 담은 이 책에서 미국 영화배우 캔디스 버겐은 로스앤젤레스 그리피스 공원에 대해 이렇게 썼다. “유명한 조경 전문가가 설계하지도 않았고 라틴어 이름의 식물이 자라지도 않는 곳”이지만 추억이 담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사랑스럽다는 고백이다. 공원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들, 그들의 추억과 기록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세계 여러 도시의 공원 18개에 대한 친밀하고 생생한 보고서다.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 등 여러 분야의 낯익은 인물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멀리서 조망하듯 쓰지 않고 개인적 경험과 관점을 드러냈다.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개인 연애사에 역사적 사실을 엮어 놓아 읽을수록 매력적이다. 이탈리아 출신 사진작가 오베르토 질리의 사진도 일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공원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묶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다. 이 맛있는 책을 휴일 오후 서울 통의동 사무실 근처 작은 공원에 앉아 천천히 읽었다. 공원에 앉아 공원에 관한 책을 읽다니. 도시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다. 그 사치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더 많은 공원이 생기고 공원에 대한 책이 더 나와야 할 까닭이다.
1997년 초 조성된 이곳 통의동 공원은 지난해 12월 청와대가 “경호상의 필요”를 이유로 인근 주택과의 맞교환을 통해 매각돼 사유지가 됐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걸어둔 ‘공원을 지켜 주세요’ 현수막 빛깔이 햇빛과 비바람에 바래 간다. 언제 저 현수막을 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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