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살’이 그의 별명이다. 이름에서 딴 별명이라면 초패왕 항우가 그토록 사랑했다던 ‘우미인’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우보살’은 조금 의외였다.
“2003년에 극단 연우무대출신들이 모여 ‘이루’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내가 언니 축에 든다. 어떤 사건, 어떤 일이 벌어지면 끝까지 다 듣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객관적인 말을 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후배들이 ‘언니가 뭐 보살이라도 돼?’라고 한 것이 별명이 됐다.”
그는 남들에게만 ‘객관적인 충고’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모나지 않게 살라고 속삭였던 것 같다.
“사실은 인터뷰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나 배우로서보다는 사람으로서, 우미화로서는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직업인’으로 인터뷰할 것이다(그래도 그의 말을 소개하는 것은 ‘그’라는 인물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서른 살 즈음에 이미 ‘보살’의 경지에 오른 ‘그’는 누구인가. 배우 우미화(43)다. 4월 12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연극판에서 ‘보살 같은 성격’은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 이 시대 여배우로서 행운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행운, 불행을 잘 생각 안한다. 불행이라는 단어도 잘 안 쓴다. 그래서 ‘우보살’이라고 하는지도 모르지만…. 보통 남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받아 넘기는 편이다.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내가 초를 쳤다. 겉으로는 참는 척 하고 혹시 이불 속에서 끌탕을 하는 건 아닌가.) 안으로만 삭히면 그렇겠지만,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예 보지 않기도 한다. 그런 것으로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 ‘이건 그냥 사건이야’ 하고 넘긴다. 그렇게 하면 털어진다.”
그의 삶의 방식은, 손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손해 본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뭔가 계기가 있었을 법하다.
“2011년 5월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손기호 작·연출, 극단 이루, 이하 복사꽃)라는 작품으로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받았으나 그 전후에 응모했던 이런 저런 오디션에서는 모두 떨어졌다. ‘나는 극단 이루가 없으면 무대에 설 수 없는 배우인가.’ 배우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그해 8월 스페인 산티아고로 여행을 갔다. ‘배우를 하라고 누가 시킨 게 아니잖니. 나를 괴롭히고,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 필요가 있을까. 내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내가 먼저 즐겨야겠다.’ 대자연 속에서 그런 결론을 내린 이후로는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 즐겁지 않으면 진지한 것은 진지해지지 않고, 힘든 건 더 힘들어진다.”
산티아고에 다녀온 이후 그는 배우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해 말 역시 ‘복사꽃’으로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을 받는다(상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그는 2013년 ‘세 자매’(안톤 체호프, 문삼화 연출)로 또다시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을 수상한다).
그의 연기 인생은 1998년 서울시극단 연수단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중의 적’(헨리크 입센)에서 ‘페트라’역으로 데뷔했다. 김석만 연출이 24살의 초짜를 파격 캐스팅한 작품으로, 우미화도 당시의 설렘을 잊지 못한다. 올해로 배우생활 20년째.
그동안 그는 ‘타고난 배우’라는 평가를 받아 본 적도, 그런 평가를 갈망해본 적도 없다.
“어느 선배가 말했다. ‘너는 배우로서는 너무 평범하다. 아무 역이나 할 수 있는데도 늘 80%만 한다’고 했다. 배우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너는 끼가 충만하다, 그러니 배우해라’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다. 무대에서 사람들 만나면서 연극을 시작했으니 자질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동기부여가 약하다보니 연기와 배역의 몰입도가 떨어졌던 것 같다. 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2때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강원도 함백이라는 곳이다. 태백도 아니고 함백. 영월 근처에 있는 깡촌이다. 남산에 있는 보성여고로 전학을 왔는데 서울 생활에 적응이 힘들더라.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연극을 만들면서 마음이 참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편하고 좋으니까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독문과 졸업 후에 연영과에 편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독문과 친구들은 지금 내가 배우로 산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정말 숫기 없는 여학생이었는데 나도 놀랍다.”(웹진 ‘연극in’ 김은성의 연극데이트, 2014년 4월)
고향이 폐광이 되면서 아버지는 홀로 서울에 와서 돈을 벌고, 언니도 서울서 혼자 자취를 하고, 우미화는 나중에 그 언니의 자취방에 합류하고, 어머니는 고향집 정리하고 제일 나중에 서울로 올라오고. 어쩌면 시골 소녀가 현대판 디아스포라에서 느낀 고독과 그 고독을 벗어나려는 길항(拮抗)이 우미화가 연극에 빠져든 원점인지도 모른다.
그의 인터뷰 중 ‘편하고 좋으니까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라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자기 생각을 남처럼 말하고 있다. 연극에 빠져드는 자신을 설명할 ‘그 무엇’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는 숙명여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했고,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편입했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 대학 시절의 연극은 독일어 작품의 번역극이었는데, 그는 배우로 무대에 섰다. 그렇지만 그는 “독일어 번역극을 통해 자연스럽게 희곡을 접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평범’은 그리 향기로운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우보살’이다.
“평범한 것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줬다. 그 말을 통해 더 단단해져 왔다고 생각한다. 어떤 배우는 어떤 역을 잘 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러나 나는 어떤 캐릭터하면 딱 우미화가 떠오르는 그런 배우는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는 자질보다 어떤 얘기를 누구와 함께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물론 전 단계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전에는 내 중심으로 작품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떤 작품을 만나면 무슨 얘기인지를 본다. 요즘은 사회적인 얘기도 오고, 아픔, 고통, 잊혀진 얘기들도 내게로 온다. 캐릭터를 만나는 방식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그저 배역에 충실했는데 지금은 어떤 인물을 만나면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를 고민한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이 인물을 이렇게 읽었는데 관객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요즘 그런 지점에 와 있다.”
그는 성숙한 것이다. 장독 안은 조용해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지만 때가 되어 뚜껑을 열면 언제나 색깔과 냄새와 맛으로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복사꽃’은 우미화의 DNA를 채취할 수 있는 좋은 시료다.
“이 작품의 주연은 원래 내가 아니었다. 사정이 있어서 내게로 온 것이다. ‘우미화가 딱이야’하는 역도 아니었다. 고민했고 힘들었다. 그런 마음을 연출에게도 얘기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자 부담이 사그러들었다. 힘을 빼고 연기를 하니 오히려 좋은 피드백(상을 포함해서)이 왔다.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그 이후로 남들이 작품을 믿고 맡기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의 배우관은 조용하지만 점점 확고해지는 것 같다.
“나는 차근차근, 굴러굴러, 변해 왔다. 점점 커가면서 사람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좋은 것, 나쁜 것 다 흡수하며 사람다워졌다. 배우는 특별하다거나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없다. 잘하는 배우보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좋은 배우란 실력과 성격, 주변과의 관계가 모두 좋아야 한다는 뜻이고, 남들이 ‘함께 하고 싶은 배우’라고 말해 주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결국 그는 타고난 배우, 재능이 있는 배우보다는 꾸준한 단련을 거쳐 아름다워지는 배우를 지향하는 것 같다. 데뷔 이후 배우에 대한 우미화의 시각은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작품을 보는 시각은 약간 달라진 것 같다. 작품 이름이 여럿 나온 김에 식상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작품이 기억에 남는지를. 그는 “대표작을 고르기가 힘들다”고 했다. 모두 애착이 간다는 뜻이다. 그래도 또 물었다.
그는 ‘말들의 무덤’(공동창작, 김동현 연출), ‘썬샤인의 전사들’(김은성 작, 부새롬 연출), ‘하나코’(김민정 작, 한태숙 연출)‘ 등을 언급했다. 공교롭게도 세 작품은 모두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다. ’말들의 무덤‘은 4·3사건부터 50년대 중반까지 민간인 학살사건에 관련됐던 희생자와 가해자의 말(言)들을 뽑아 무대에 올린 것이고, ’썬샤인의 전사들‘도 4·3사건부터 최근까지 굵직한 사건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소년 소녀들의 눈과 입을 통해 현대사의 폭압성을 고발하고 있다. ’하나코‘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남들은 주목하지 않았지만, 본인에게 의미 있는 작품은 있는지도 물었다. 2013년의 ’농담‘(정영욱 작, 김낙형 연출)을 꼽았다. 이 작품은 투견장을 무대로 하고 있고, 투견장은 곧 피가 튀는 사회의 메타포다.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인물들은 곧 싸움에 진 개나 마찬가지다. 우미화는 이 작품에서 매독균에 감염돼 임신한 것처럼 배가 부른 탈북 여인 ’칼멘‘을 연기했다. 칼멘은 투견장 주위에 소금을 뿌리기도 한다. 한 줌의 소금으로는 크고 질기고 고질적인 거악(巨惡)을 정화할 수 없는데도. 그는 “연습은 더디고 힘들었다. 관객도 많지 않았다. 그들조차 보는 것을 매우 힘들어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불편한 진실을 불편할 정도로 정면으로 취급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작품 제목이 ’농담‘인 것은 ’어쩌면 인간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신이 내뱉어 놓은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생각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독한 패러디다.
우미화는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처음에는 나를 위한 위로로 연극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점점 타인과 사회와 세상을 위한 위로로 바뀌어야 한다고 느낀다. 배우를 하면서 얻은 작고도 큰 깨침이다.”
그래서 물어봤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느냐고.
“출연의뢰가 들어왔을 때 고민은 있다. 그러나 흔치 않은 일이다. 몇 편이 한꺼번에 막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다, 의뢰하는 쪽에서 내가 할 만한 것을 제시하니까. 1년에 보통 3,4편을 하는데 재공연작이 있으면 4,5편 정도다. 아직까지는 맡는데 많이 불편했던 작품은 없었다.”
그의 말을 종합하자면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어떤 역이든 맡고 있지만, 세상이 온통 장밋빛이 아님도 알고 있고 배우로서 고민할 때는 고민하고 싶다는 선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우리 연극계는 아직 배우의 고민과 선택을 허용할 만큼 윤택하지 못하다).
그가 맡은 역 중에는 다른 의미에서 화제가 되는 것도 있다.
’복사꽃‘에서 그는 70대 할머니 역을 맡았는데, 그 전 해인 2010년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손기호 작, 연출)에서는 60대 앉은뱅이 분이 역을 맡기도 했다. 두 배역은 모두 호평을 받았지만, 그는 노인역 전문가가 되는 것은 사양한다.
최근 출연중인 ’맨 끝줄 소년‘(후안 마요르가 작, 김동현 연출, 손원정 리메이크 연출)도 그와는 몇 가지 인연이 있다. 그는 김동연 연출 작품에 세 번 출연했지만 모두가 공동창작이었다. 그는 2012년 한 인터뷰에서 김동현 연출을 콕 집어 공동창작이 아닌 작품으로 함께 작업해 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김 연출이 지난해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2015년에 연출한 ’맨 끝줄 소년‘이 그의 최후작이 됐고, 결국 우미화는 그 작품을 통해 고인과 만나게 됐다.
“극단 이루는 서사 중심의 극단으로 인물이 극을 좌우한다. 그러나 김동현 연출은 다른 언어로 무대를 만든다. ’맨 끝줄 소년‘을 다른 연출이 했다면 김 연출과는 달리 관음을 강조하거나 인물 간의 갈등을 더 세게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연출은 감정이나 정서에 매달리지 않고 극을 아주 차갑고 냉철하게 이끌어간다. ’맨 끝줄 소년‘은 연극이 끝나면서 관객에게 고민을 던져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우미화는 문학교사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로 나온다. 남편은 자기 반 학생 클라우디오의 문학적 성취를 위해 클라우디오가 친구집을 ’관음‘하고 파괴하는 것을 용인하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후아나는 남편의 위험한 곡예에 경종을 울리는 역이다. 어쩌면 후아나는 이 연극에서 가장 ’비연극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을 상징하기 위한 배역인지도 모른다.
여담 하나. 우미화는 ’맨 끝줄 소년‘에서 한 소년이 위험한 글쓰기를 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는 ’썬샤인의 전사들‘에서는 한 젊은이에게 글을 쓰도록 강력하게 권유하는 역할이다. 두 배역 사이에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두 작품을 동시에 봤던 나는 우연히 그 점에 눈길이 갔다. 어쩌면 그게 배우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전조사를 하고 직접 인터뷰를 하며 그가 매우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딱 하나, 예전 인터뷰와 이번 인터뷰에서 차이를 보인 것이 하나 있었다. 연극배우의 영화출연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는 2011년의 한 인터뷰에서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고 “연극이 방송이나 영화로 가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도 영화에 단역으로 세 번 출연했다고 한다. 생각이 바뀐 것인가.
“예전에는 연극영화과가 많지 않았다. 대학의 극회출신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연극영화과 출신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연극무대가 풍성해진 것도 아니지만…. 내가 영화를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연극이 더 좋았고, 선배들도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가는 게 적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지금은 물꼬가 확 터졌다. 지금까지는 무대를 사랑했지만, 영화 쪽에서 손을 내밀면 할 거다. 그렇지만 영화의 한 두 장면에만 나가려 해도, 연극과 겹치면 갈 수가 없다. 인연이 안 되면 못가는 것이다. ’달려가겠다‘는 아니다. 그러나 앞날은 누구도 모른다.”
그는 지난해 ’7년의 밤‘(정유정 작, 추창민 감독, 미공개)에 류승룡의 어릴 적 어머니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는 “그런데 아들인 류승룡 배우는 보지도 못했다”며 웃었다. 그는 “연극배우나 영화배우나 같은 ’배우‘라는 카테고리에 들어 있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다르다. 영화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은 영화 출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지금 연극일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 거기에 대해 남편과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남편은 연출가 윤정환(45)으로 그야말로 동지다. 윤 연출은 2004년 극단 산을 만들고 창단공연으로 ’짬뽕‘을 올렸는데 크게 히트를 쳤다. 이 작품은 거의 매년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 만나 10년 이상 연애를 했고, 2006년에 결혼했다. 우미화는 “남편과는 자연스럽게 함께 작업은 하지 말자고 해서 남편 작품에는 출연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족으로 살고 있지 않나, 라는 농담도 한단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이들에게도 ’웃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짬뽕‘이 5.18을 다뤘다고 해서 근 몇 년 지원대상에서 배제됐다고 한다.
인터뷰 도중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어쩌다보니 그에게 영화출연 문제와 남편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게 됐다. 그러자 그는 “왜 이런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하는지”라며 살짝 불쾌감을 표시했다. 아마도 자신의 직업에 대한 ’무례‘로 여겼던 것 같다. 나는 먼저 물어본다고 먼저 쓰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면서도, 그런 태도에서 그의 프라이드를 느꼈다는 점을 고백한다(내가 좋은 인상을 받는다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우미화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인(動因) 무엇인가.
“무대 위에서 행하는 나와, 행하는 나를 지켜보는 내가 있는 것 같다. 둘이 조율이 잘 되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 지켜보는 내가 세면 캐릭터가 흔들린다. 그렇다고 내가 캐릭터에 훅 빠지는 스타일도 아니다. 무대 위의 나도 우미화고, 무대 밖의 나도 우미화다. 다 터고 삶이다. ’나는 배우다‘라는 의식이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배우로 설 수 있고, 더 좋은 역할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를 믿고 더 용기도 낼 수 있고.”
인터뷰 말미에 배우로 먹고 살 수 있는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슬쩍 물어봤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인터뷰가 끝났다는 표시로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연필을 들어야 했다. 그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왔으므로.
“힘들진 않아요!”
그에게 큰 힘이 돼주고 있는 극단 ’이루‘의 ’이루‘는 ’이루다‘ ’모두‘ ’기쁜 눈물(怡淚)‘이라는 뜻이다. 나는 우미화가 제 나이에 맞는 진짜 노인역을 맡을 때까지 무대를 지켜주길 바란다. 그리하여 꿈을 이루고 기쁜 눈물도 살짝 비추는 기회를 만들어 ’평범함‘의 ’위대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후기:그는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를 ’죽순 같다‘고 했다. 겉은 수수하지만, 안은 매끄럽고 단단하다는 뜻으로.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여배우를 ’죽순같다‘고 하는 게 과연 좋은 표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 표현은 보류하고 더 고민해보려 한다. 그는 자신의 마스크를 ’차가운 얼굴‘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맞는 표현 같지는 않다. 차갑다기보다는 깔끔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도 해서(하기야, 한 인간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단어가 이 세상에 있을 리 만무하지만).
(우미화가 출연했던 연극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장자의 점‘ ’웰컴투 배비장하우스‘ ’저 사람 무우당 같다‘ ’우투리‘ ’한 여름밤의 꿈‘ ’부부 쿨하게 살기‘ ’이‘ ’연애얘기아님‘ ’우리 말고 또 누가 우리와 같은 말을 했을까‘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싸우는 여자‘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찌질이 신파극‘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우리동네 굿뉴스‘ ’짐‘ ’사람을 묻다‘ ’말들의 무덤‘ ’세 자매‘ ’본다‘ ’뺑뺑뺑‘ ’황금연못‘ ’생각나는 사람‘ ’삼풍백화점‘ ’돌연히 멈춤‘ ’하나코‘ ’날 보러와요‘ ’엄마가 낳은 숙이 세 자매‘ ’썬샤인의 전사들‘ ’연변엄마‘ ’맨 끝줄 소년‘ 등)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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