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살구꽃이 흐드러진 봄날이었다. 가족, 친지들과 동네 가까운 절에 갔다. 시오리 산길이 마치 소풍 같았다. 그릇도 부족하던 시절이다. 크고 작은 그릇을 하나씩 챙겨서 밥을 덜고 나물을 얹었다. 늦은 점심으로 나물비빔밥을 먹었다. ‘절밥’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가족, 친지들 중 몇몇은 개종(改宗)을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절에 가지 않았다. 절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절밥’만 오랫동안 입에 오르내렸다. 내용은 같았다. “아무런 반찬도 없이 그저 나물만 넣고 비볐는데 그 밥이 어찌 그리 맛있었을까?” 누구는 “된장이 좋아서”라고 해석했고 누구는 “참기름이 좋아서”라고 주장했다. 보리가 적당히 섞인 밥이 좋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먼 산길을 걸은 후에 먹은 늦은 점심이니 뭐든 맛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우리는 ‘절밥’을 딱 한 번 먹었지만 오랫동안 그 ‘절밥’을 되새김질했다.
사찰음식은 스님들이 먹는 음식이다. 사찰을 찾아온 신도, 관광객들도 먹는다. 사찰음식이 바깥으로 나왔다. 식당의 음식이 되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사찰음식 전문점이 많이 생겼다.
더러 사찰음식 전문점에 간다.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먹었던 그 절밥이 남아 있다. 불행히도 그때의 그 절밥과 닮은 사찰음식은 드물다. “사찰음식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육류와 오신채(五辛菜)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음식이라고 말한다.
오신채는 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다. 흥거는 추측이 분분하다. 무릇이라고 하거나 인도 중동에 자생하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식물이라고 한다. 제각각이다. 근거도 부족하다. 존재하더라도, 보기 힘든 식재료를 굳이 금하다니 참 아리송하다. 조선시대에는 오신채의 의미가 달랐다. 오신채는 움파(총아·총芽 혹은 총백·蔥白), 산갓, 당귀 싹(신감초·辛甘草 혹은 승검초), 미나리 싹, 무 싹이다. 겨울이 채 가지 않았을 때 눈을 뚫고 나온 새싹들이다. 이 나물들을 입춘 무렵에 귀하게 먹었다.
오신채에 대한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정조대왕이 신하들과 나눈 이야기 중 “당나라 의종이 불교를 믿어 오계(五戒)를 받았으며 오계 중에 ‘술과 오신채를 금한다’는 계율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불교와 오신채를 연관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제 오신채는 당황스럽다. 파와 마늘은 품종이 달라지고 가짓수도 많아졌다. 대파, 쪽파, 양파가 있다. “조선시대 오신채 이후 들어온 대파와 양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대답이 옹색해진다. “향과 맛이 강한 생강이 왜 오신채에서 빠졌을까?”에 대한 대답도 보기 힘들다. 임진왜란 이후 들어와서 조선 말기에 퍼지기 시작한 고추(고초·苦椒)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산초(山椒)는 가능하고 후추(호초·胡椒)는 금할 것인가?
애당초 오신채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신채를 정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쳐다보는 짓이다. 오신채 금지는, 입맛을 위한 별난 음식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음식의 맛을 줄이고 양을 최소화하라는 의미다. 맛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 입맛의 욕심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한정식처럼 코스로 나오는 사찰음식은 절밥과 다르다. 숱하게 절밥을 얻어먹었지만 코스 식 절밥은 없었다. 발우공양이 한국 사찰의 일상적인 음식이라면 발우공양을 사찰음식으로 내세워야 한다. 청수물로 마지막 작은 한 톨까지도 버리지 않고 아끼는 것이 사찰음식이다.
사찰에서 먹지도 않는 사찰음식을 내세우는 것은, 철없는 아이의 뽐내는 행위와 다름 없다. 장뇌삼, 송이버섯을 내놓는 것이 과연 사찰음식인지 되짚어 봐야 한다. 사찰음식은 화려한 밥상이 아니다. 사찰음식은 한국 불교와 사찰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으니 색깔도 아름답게, 접시 담음새도 신경 쓴다”는 말은 허망하다. 외국 관광객에게 보여주려고 스님들의 먹물빛 가사장삼을 예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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